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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퇴직 가장 “막노동 전전” … “대학 나와도 취직 안 돼” 자식 세대도 아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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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외환위기 20년 <상> 새로운 위기 대비하라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덕선 부모. [화면 캡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덕선 부모. [화면 캡처]

“임자, 나 오늘 명예퇴직당했네. 미안하네.”

덕선 아빠·가족 세대의 분투기 #마흔여섯에 일자리 잃은 생산직 #공장 부도난 뒤 컨테이너 생활도 #이제 은퇴하고 나니 노후 더 캄캄 #대기업 입사 원했던 ‘당시 초등생’ #늦깎이로 공대 갔지만 대출 눈덩이 #“차라리 기술을 익히자” 용접 배워 #외환위기, 경제 역동성도 앗아가 #“기업 키워 성장 선순환 이뤄내야”

“아니다. 당신이 왜 미안하노. 당신 미안한 것 한 개도 없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등장인물인 ‘덕선 아빠’는 극 중 시점으로 1994년에 30여 년간 몸담아 온 직장에서 명예퇴직했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 구조조정에 시동을 걸던 시기였다. 3년 뒤인 1997년, 외환위기라는 태풍이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다.

외환위기에서 촉발된 중산층 붕괴와 양극화, 저성장은 덕선이, 그리고 덕선이의 자식 세대들에게까지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다. 현실 속 덕선 아빠와 그 가족들은 지난 20년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20년 전 삼미특수강 붕괴와 함께 거리로 내몰렸던 노재우(65)씨와 외환위기의 여파를 힘겹게 감당하는 취업준비생 김영훈(30·가명)씨가 소회를 털어놨다.

#1997년 3월 19일. 부도로 공장이 멈췄다. 내 인생에 그만큼 충격적인 일은 없었다. 사표를 내거나 해고되지 않는 한 월급을 못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환위기는 상상 밖의 절망이었다.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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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살이던 1977년, 나는 한국종합특수강에 생산직으로 취직했다. 기계에서 나오는 3m짜리 철판을 2인 1조로 12시간씩 들어 날랐다. 땀에 전 몸을 기계에서 나온 냉각수로 씻었다. 그래도 희망이 자랐다. 월급(6만~7만원)이 당시 면 서기(9급 공무원)보다 높았다.

91~92년은 생애 최고 호황기였다. 기본급이 매년 7~10%씩 올랐다. 한 해 성과급을 1000%나 받았다.

외환위기는 모든 걸 끝장내버렸다. 철강처럼 단단할 줄 알았던 ‘정년 보장’이 용광로에 쇠 녹듯 허물어졌다. 공장이 멈춘 지 20일째 되던 날, 창원역에서 열차를 타고 경북 구미시 아파트 건설현장에 막노동을 하러 갔다. 일당 6만원을 받고 컨테이너 박스에서 잤다. 회사가 새 주인을 찾는 데는 4년이 걸렸다. 공장으로 돌아가 2009년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다.

노후가 캄캄했다. 퇴직 1년 반 만에 협력업체에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해 일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40년 전과 같은 곳에 출근했다. 월급은 퇴직 전의 40% 수준이다. 나는 열심히 일한 끝에 내 집을 마련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집을 살 수 있을까. 외환위기도 극복했고 나라도 잘살게 됐는데 소시민의 삶은 왜 더 힘들어졌을까.

전문가 10인의 진단과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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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닥. 불꽃이 튄다. 쇳조각 타는 냄새. 이제 익숙하다. 용접기술을 배운 지 어느덧 6개월이 넘었다.

1년 전만 해도 내가 용접을 배우게 될 줄 몰랐다. 2015년, 나는 수도권 유명 공대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군 제대 뒤 28살 나이에 편입학을 택한 이유는 단 하나, 취직이다. 이 정도 공대를 졸업하면 나도 대기업에 취업할 거라 믿었다.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이 내겐 큰 목표였다.

우리 집은 차상위계층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초등학생이던 난 세상이 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다행히 세상은 망하지 않고 경제는 살아났다. 그런데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학기당 등록금은 400만원이 넘는다. 국가장학금은 180만원만 나왔다.

그래도 길이 있다. 학자금대출이다. 등록금뿐 아니라, 생활비 대출도 학기당 150만원 한도로 매 학기 받았다. 학자금 대출은 취업할 때까지는 상환을 유예해준다. 매학기 쌓인 빚에 이자가 붙어 총액은 2489만3457원으로 불어났다.

그런데 취업이 안 됐다. 대기업은 서류전형조차 통과할 수 없었다. 문제는 나이였다. 서른살 늦깎이 취준생을 반기는 대기업은 없었다.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려도 봤다. 인턴으로 겪은 중소기업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매일 수당도 없는 야근을 하며 180만원 월급을 받았다. 차라리 기술을 익히자. 고민 끝에 찾은 길이 용접이다. 집에 여유가 있었으면 아마 나도 7급,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겠지만 내겐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왜 그런 일을….” 부모님은 지금도 말리신다. 하지만 이제 난 직업은 상관 없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다. 추석 연휴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나서려고 한다. 한참을 돌아, 이제야 길이 보인다.

지난달 청년희망재단의 ‘청년 학자금대출 100만 지원 사업’을 신청했다. 저소득 대학 졸업자에게 학자금대출 상환금을 100만원까지 지원해준다고 했다. 그때 내가 신청서에 작성한 사연으로 내 얘기를 마치겠다. “그동안 저소득층으로 국가장학금 등 복지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빨리 경제활동을 통해 학자금대출을 성실히 갚고 정직한 납세활동을 통해 정부 도움을 갚고 싶습니다.”

#현실 속의 덕선 아빠와 덕선이가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야성적 충동’이 그립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의 한국 경제는 역동적이었다. 기업가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투자 기회를 잡아 기업을 키울 수 있을지에 골몰했다.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역동성이 사라졌다. 젊은이는 미래 희망을 잃었다. 좋은 일자리는 줄고 질도 나빠지고 있다. 이걸 막으려면 결국 기업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기업이 다시 역동성을 되찾아 성장을 주도하고 고용을 늘려 성장의 선순환을 이뤄야 한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키우고 ‘고용의 금맥’인 서비스업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규제완화가 필요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부가 이미 만들어 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나 규제프리존특별법 같은 것이라도 시행해 봤으면 좋겠지만 좀처럼 국회 문턱을 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답답할 뿐이다(최종찬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박경서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의 진단을 종합해 재구성).

박진석·한애란 기자, 창원=심새롬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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