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한산성' 이병헌 "치욕적이고 암울한 역사를 그리는 건 용기"

중앙일보

입력

김훈 원작의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 역을 맡은 배우 이병헌.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김훈 원작의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 역을 맡은 배우 이병헌. [사진 CJ엔터테인먼트]

 배우 이병헌이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5년 만에 사극을 선택했다. 김훈 작가 『남한산성』을 각색한 같은 이름의 영화다. '도가니''수상한 그녀'를 만든 황동혁 감독이 연출했다. 이병헌은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 역을 맡았다.

김훈 원작 '남한산성'에서 척화파 최명길 역 #"영화 내내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멜로부터 액션, 사극까지 두루 출연한 배우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5년 만의 사극

26일 인터뷰에서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감정을 누른 채로 해야 하는 역할이었다”고 했다. 김훈 특유의 담백한 대사가 다소 건조하게 이어지는 이 영화에서 이병헌은 묵직하게 역할을 해냈다. 최명길은 명과 청나라,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조(박해일 분)에게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죽음을 피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청과 맞서 싸우기를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과 대립한다. 그는 “당시 조선의 상황은 지금 대한민국과 너무나 흡사하다. 강대국들의 이익 사이에 늘상 끼어있었던 현실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이병헌은 ‘공동경비구역JSA’(2000) ‘번지 점프를 하다’(2001)로 시작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내부자들’(2015)까지 멜로ㆍ액션ㆍ사극을 오간 배우다. 그는 “배우로서 최종적으로 어떤 형태가 잡힐지 알 수 없지만 이것저것 하며 시간들이 지나면 알게될 것 같다”고 했다. '남한산성'은 추석 연휴를 겨낭하며 다음 달 3일 개봉한다.

‘남한산성’ 완성본을 보니 어떤가.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또다른 의미로 흡족스럽다. 그동안 한국 영화들이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쏠려있었는데 다른 영화가 나온 것 같다. 뿌듯하다.”

어떤 점에서 다른 영화인가.

“감독의 연출을 봐도 알 수 있다. 보통은 성공의 역사를 다루는 게 흥행을 위해 좋다. 하지만 치욕적이고 암울한 걸 그린 것부터가 용감하다. 영화는 차분하다. 관객수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렸다. 통쾌하고 시원하지는 않고, 보는 내내 힘들고 답답할 수 있는 영화다. 답을 제시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를 그리고 있다.”

차분한 영화가 흥행 면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다.

“많이들 숫자로 영화를 이야기 한다. 내가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는 숫자가 영화 제목과 거의 동일하게 이야기된다. 하지만 배우가 영화를 선택할 때는 숫자에 대한 생각이 좀 덜하다. 이야기가 얼마나 울림을 주는가, 얼마나 꽂히느냐가 중요하다.”

최명길이란 인물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나.
1636년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중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1636년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중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이 시나리오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소신이 너무 다른 두 명을 치우침 없이 그렸기 때문이다. 보통은 읽는 사람이 한 쪽으로 설득당하게 마련이다. 그래야 재미있고 통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그렇지 않았다. 이 사람 얘기를 들으면 이쪽이 맞는 것 같고 다른 쪽을 들으면 또 그랬다. 100번은 왔다갔다 한 것 같다. 나라를 위한다는 큰 뜻은 같지만 대립하고 있는 두 사람이 정말 50 대 50으로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캐스팅이 왔으면 김상헌(김윤석 분) 역할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시종일관 말로 대립한다. 촬영장에도 긴장감이 흘렀나.

“두 사람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는 똑같다. 다만 방법이 판이하게 달랐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왕 앞에서 핏대를 올리며 싸우다가도 밖에서 만나면 예의를 갖춰 인사하지 않나. 촬영장 분위기도 그랬다. 김윤석씨는 동네 아저씨 같이 편했고.(웃음)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멜로ㆍ액션을 할 때와 비교해 어떻게 감정을 잡고 연기를 했나.

“이 영화에는 액션보다 훨씬 날카롭고 치열한 말들이 있고, 멜로보다 훨씬 강한 나라에 대한 사랑이 있다. 장르로 구분지어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최명길은 인조반정으로 광해를 몰아냈던 인물이다. 5년 전에는 광해를, 지금은 최명길을 연기한 느낌은 어땠나.

“배우가 연기를 할 때 그 인물과 생각이 100% 일치해서 하지는 않는다. 이해가 안되는데 억지로 연기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설득 당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인물을 연기한다. 두 인물은 모두 설득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광해를 내쫓은 최명길을 연기한 것은 아이러니다.”

‘남한산성’은 현재 한반도 정세와 맞물릴 수 있겠다.

“영화를 보고 났는데 누구 편인지 알 수 없는 것, 내가 그 때 왕이었어도 최명길과 김상헌 중 누구 손을 잡아줬을지 판단할 수 없었던 게 너무 슬폈다. 영화를 보면서 답답하기도 했다. 흥행 면에서 문제가 좀 있을 수도 있는 점이지만 반대로 그게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병자호란의 상황은 현재 대한민국과 너무 흡사하다. 지금도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것과 공교롭게도 맞닿아있다. 그런데 늘상 그래왔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다.”

‘광해’에 이어 ‘남한산성’까지 영화가 정치ㆍ외교 상황 등에 비추어 해석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시류에 많이 기대거나 반대로 부담스러워하는 편은 아니다. 대세에 좌우되는 편은 아니다. 영화가 꼭 시대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판타지나 SF 영화는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영화에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모르겠지만, ‘남한산성’만큼은 시대에 많이 닿아있는 것이 맞다.”

상대 배우 김윤석의 연기는 어떻게 봤나.
'남한산성'에는 배우 김윤석, 박해일, 박희순, 고수 등이 출연한다.[사진 CJ엔터테인먼트]

'남한산성'에는 배우 김윤석, 박해일, 박희순, 고수 등이 출연한다.[사진 CJ엔터테인먼트]

“우리 둘 다 왕을 향해 대사를 했기 때문에 활영할 때는 나란히만 있었고 얼굴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대사가 왕한테 갔다가 상대에게 갔으니까. 눈빛과 표정은 볼 수 없었고 대사의 떨림, 소리만 듣고 느꼈는데 열이 가득한 배우였다. 한번 부딪히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정이 달아올라서 ‘자기 자신도 어떤 대사를 하는지 모르면서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열을 쏟아내더라.”

영화 내내 감정을 억누르는 듯했다. 어떤 정도의 무게로 연기를 설정했나.

“계획은 없었다. 조절이 필요했던 건 아마 김윤석씨였을 것이다. 지르고 지르지 않고, 변화가 있었으니까. 반면 최명길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감정을 눌러야 했다. 직설적 표현도 돌려서 했다. 답답할 수도 있었던 역이다. 애드립도 없고 대사도 바꿀 수 없었다. 대사를 손본 것은 딱 한 군데다. 내가 감독에게 초반부터 부탁했는데 ‘명길도 한번쯤은 나오는 말을 막 하게 해달라’고 했다. 마지막에 ‘무엇이 임금이옵니까. 오랑캐 발 밑을 기어서라도…’라는 대사로 감독이 바꿔줬다. 한번쯤은 이렇게 직설적으로 하고 싶었다.”

원래 감독에게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편인가.

“질보다 양으로 간다. 예를들면 코미디 장르를 찍을 때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데 질이 중요하진 않고 그저 많이 낸다.(웃음) 감독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 건 맞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딱 한 군데 바꿨다. 무엇보다 감독이 똑똑해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이 영화만큼 모니터링을 안 한 영화는 처음이다.”

후속으로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하고 있다.

“쉬어본 적이 별로 없다. ‘남한산성’ 끝나고 드라마까지 두세달 쯤 비는데 그때 미국 영화 하나 찍자고 미국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 그러다 쓰러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거절했다.”

결국 어떤 배우로 자리잡고 싶은가.

“이것저것 하며 시간이 지나봐야 형태가 잡힐 것 같다.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서 후회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편이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면 모양이 나올 것 같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