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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파워엘리트] “출세하려는 자, 이것을 종교처럼 믿으라”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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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1일 저녁, 리훙중(李鴻忠) 당시 후베이(湖北) 성 서기가 현(縣) 안전 담당 부서에 암행을 나갔습니다. 현장에서 그는 전화기를 들고 퇴근한 현지 안전 담당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의 성은 오 씨였습니다.

중국판 암행어사 #차기 정치국원 예약

-오 국장, 저 리훙중입니다. 요즘 현의 치안 상황이 어떤지 알고 싶은데요. 말씀 좀 부탁합니다.(리 서기)
-뭔 소리야 이거. 당신이 서기라고. 끊어.(오 국장)

전화는 바로 끊겼고 한 방 먹은 리 서기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습니다. 화들짝 놀란 비서가 오 국장에게 전화를 해 상황을 알렸지요. 신발 바닥 타는 냄새가 나도록 달려온 오 국장은 "장난 전화인 줄 알았다"며 석고대죄를 청했습니다. 현급 치안 부서에 성 당서기가 올 거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거지요. 오 국장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겠지요.

현재 톈진시 서기인 리훙중(61)은 지금도 암행어사로 유명합니다. 사전에 알리지않고 몰래 현장을 방문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찾는 중국에서 거의 유일한 지방 지도자로 통합니다.

후베이 당서기 시절 암행감찰을 하는 리훙중 [사진 정스얼]

후베이 당서기 시절 암행감찰을 하는 리훙중 [사진 정스얼]

#2010년 초, 후베이성 양회(전인대와 정치 협상 회의) 기간 중 리훙중 서기는 갑자기 '만도초월(彎道超越)' 이론을 꺼냅니다. '굽은 길에서 선두를 추월한다'는 자동차 경기 이론입니다. 생소한 이론에 참석자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지요. 그는 설명합니다.

글로벌 외환 위기(2008년) 이후 세계 경제가 어렵다. 국내 다른 지역도,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위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난 이게 기회라고 본다. 자동차 경주를 보면 굽은 길에서 앞차를 추월하지 않나. 지금 우리 성의 경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기회다.

위기를 기회로 인식하는 전략적 발상에 후베이성 성 관리들은 그를 기재(奇才)의 리더라고 불렀습니다. 실제로 그는 후베이 성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 창장(長江) 중류 경제 부흥을 이룹니다.

리는 현재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한 곳인 톈진(天津) 시 서기입니다. 시진핑 주석의 측근으로 알려졌던 황싱궈(黄兴国·63) 전 서기가 2016년 9월 4000만 위안(약 68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낙마하면서 소방수로 긴급 투입된 엘리트지요. 당시 시 주석이 가장 개혁적이고 청렴한 리더를 뽑아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현재 당 중앙위원인 그는 10월 18일 시작하는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 진입이 확실시됩니다. 4대 직할시 서기의 정치국원 진입은 거의 불문율에 가까우니까요. 1993∼1997년 톈진시 당 서기를 역임한 가오더잔(高德占)을 제외하면 1984년 니즈푸(尔志富) 이래 톈진 당 서기는 모두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습니다.

양회 기간 중 발언하는 리훙중 [사진 정스얼]

양회 기간 중 발언하는 리훙중 [사진 정스얼]

산둥성 창러(昌樂) 출신인 그는 지린(吉林) 대 역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훗날 하버드 대학 연수와 광둥성 근무 시 경제 공부를 많이 해 경제 전문 파워엘리트로도 통합니다. 구체적인 가정 환경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부친이 인민 해방군 고위 장성이었다고 합니다. 공산 혁명 시기 군의 고위직은 그 자체가 강력한 권력이었지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그래서 그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벼슬길 역시 시진핑 주석과 같은 태자당(혁명 원로나 고위 관료 자녀들의 정치세력)의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는 태자당 중에서도 가장 개혁적이고 기발하고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1982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랴오닝성 선양시 정부 비서처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1985년 랴오닝성에서 당시 성 서기였던 리톄잉(李鐵映·81) 비서를 하면서 미래 파워엘리트의 기반을 다집니다. 가정 환경도 태자당에 속했지만 벼슬길 초창기에 만난 리톄잉은 이후 그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합니다. 리는 정치국원과 사회과학원 원장을 지낸 중국 정계의 거물입니다. 리는 중국의 개혁 개방이 지지부진하던 시절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주임(1987~1988년)을 하면서 개혁 전도사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992년 덩샤오핑이 개혁 개방을 독려하기 위해 현지 지도를 했던 '남순강화'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지요. 당연히 덩샤오핑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 특이한 배경도 있는데 리톄잉의 어머니 진웨잉(金維映)은 덩샤오핑의 둘째 부인이었습니다. 물론 결혼 생활을 얼마 하지 않고 둘은 이혼을 했습니다. 그런 리톄잉의 비서를 했으니 출셋길에 장애가 없을 수밖에요.

리훙중의 벼슬길 멘토 리톄잉 [사진 바이두 백과]

리훙중의 벼슬길 멘토 리톄잉 [사진 바이두 백과]

리훙중은 1985년에는 전자공업부에 들어가 국가 기간산업의 중요성에 대한 학습을 합니다. 1988년에는 전자공업부를 떠나 광둥성 후이저우(惠州) 부서기로 자리를 옮기는데 이때부터 경제 전문가로 거듭납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광둥성에게 중국 경제발전의 현장을 지휘했기 때문입니다. 2003년 선전시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개혁개방 최 전방 공격수 역할을 자임합니다. 당시 선전은 4개 어려움에 직면에 있었습니다. 개혁 개방의 선도 도시답게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른 각종 부작용이 터져 나왔지요. 이른바 토지와 에너지, 환경과 인구라는 4가지 장애물이었습니다. 토지 가격 폭등, 에너지 부족, 환경 악화, 인구 급증이었지요.

선전 대리 시장으로 부임한 그는 이 4가지 난관을 극복하지 않고는 지난 20년 동안 고속 발전을 해온 선전의 재도약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의 벼슬길에 첫 번째 도전이자 시련이었지요. 그는 개혁 개방 도시 선전에게 다시 개혁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모든 불효율과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2005년에는 아예 선전 개혁 판공실을 열어 개혁을 진두지휘합니다. 그리고 행정의 디지털화, 창업 활성화 등 수십 개 개혁 조치를 시행해 성공합니다. 중국 최고 혁신 도시, 창업도시로 이름을 날린 오늘의 선전은 그가 기초를 다진 결과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2005년 선전시의 경험은 후베이 성 서기(2010~2016년) 시절에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당시 후베이는 전국 최고 수준의 부패지수를 자랑(?)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태풍 같은 부패 척결을 했는지 그의 재임 시절 성에서 낙마한 공직자 수가 매년 전국 최고를 기록했을 정도였습니다. 부패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는 시진핑 주석이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공직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는 '만도초월(彎道超越)' 이론도 꺼냅니다. 굽은 길에서 선두를 추월한다는 전략이지요. 경제가 조금 어렵거나 전환기에 분투노력해 상대를 뛰어넘자는 겁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몰아닥친 세계 금융위기는 선진국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역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역발상과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로 창장 유역 부흥의 기초를 닦습니다.

그의 개혁 아이디어는 '창장 중류 도시군' 전략으로 진화합니다. 중국의 젖줄인 장창 유역 도시들을 묶어 공동 발전을 도모하는 이른바 '경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구상입니다. 그의 이 같은 아이디어는 2015년 국무원(행정부)이 승인하는 '창장중류도시군발전규획(長江中遊城市群發展規劃)으로 빛을 발합니다. 지방 리더의 아이디어가 중앙정부의 동의로 제도화한 대표적인 사례지요.

현장을 시찰하는 리훙중 [사진 중신망]

현장을 시찰하는 리훙중 [사진 중신망]

변신은 계속됩니다. 2016년 9월, 리훙중은 당 중앙 기관지인 인민일보 인터넷 매체인 인민왕 게시판에 왕훙(網紅·인터넷 스타)이 되고 싶다는 글을 올립니다. 인터넷을 플랫폼으로 국민들과 소통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한 겁니다.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고위 관리들은 많지만 왕훙을 언급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벼슬길 관리 기법이지요.

물론 업무가 바빠 그가 꿈꾸던 왕훙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2016년 톈진 시민들이 제기한 각종 의견 26건에 대해 답을 했습니다. 중국 직할시 서기로는 유일했다고 합니다.

그는 시진핑 주석의 충신입니다. 종교가 시진핑 사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출세하려면 시진핑 사상을 하느님처럼 받들어야 한다는 역설적 의미를 담고 있지요. 그는 시 주석을 당 중앙 핵심으로 옹립하고,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선도적으로 주창한 몇몇 지방 당 서기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이런 선도적 충성 맹세에 하나 더,  태자당 같지 않은 개혁파, 그리고 마를줄 모르는 개혁 아이디어, 부패 척결. 모든 게 시 주석이 믿고 직할시 톈진을 맡길 수 있는 자질이고 신뢰입니다. 그래서 그의 정치국원 자리는 이미 예약이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나랩 최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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