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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엔 없고 슬로라이프엔 있는 것은, 바로 공동체 정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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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호 12면

남양주 슬로라이프 국제대회 가보니

지난 22일 개막한 남양주 슬로라이프 국제대회에서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리고 있다. 흑백사진을 현상해 주는 옛날 사진관.

지난 22일 개막한 남양주 슬로라이프 국제대회에서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리고 있다. 흑백사진을 현상해 주는 옛날 사진관.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든 것엔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 슬로라이프(Slow Life)는 단순히 느리게 살자는 의미가 아니라 ‘제 속도를 찾아가자’는 얘기다. 1997년 일본의 환경운동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쓰지 신이치 교수가 만들어 낸 개념이다. 당시엔 주위의 비웃음을 샀지만 21세기 들어 급격한 글로벌화의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느리게 살자’ 넘어 ‘제 속도 찾자’ #흑백사진, 친환경 식재료 등 관심 #슬로푸드·슬로시티로 개념 확대 #“나뿐 아니라 이웃도 생각하는 삶”

최근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의 약어로 현재를 즐기자는 의미)나 휘게(Hygge·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을 뜻하는 덴마크어) 라이프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슬로라이프는 흘러간 옛 노래처럼 조금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욜로나 휘게엔 없고 슬로라이프에는 있는 게 있다. 바로 공동체 정신이다. 나 혼자 즐거우면 그만이 아니라 환경과 이웃을 함께 생각하는 삶이다.

와인병 재활용도 슬로라이프

와인 공병을 재활용한 양초 받침대 만들기.

와인 공병을 재활용한 양초 받침대 만들기.

슬로라이프 서예체험. [사진 남양주 슬로라이프 국제대회 조직위]

슬로라이프 서예체험. [사진 남양주 슬로라이프 국제대회 조직위]

지난 22일 슬로라이프 국제대회가 열린 경기도 남양주시 체육문화센터를 찾았다. 26일까지 진행되는 행사엔 숨가쁜 일상 속에서도 슬로라이프의 가치를 실천하려는 사람이 다수 참가했다. 남양주시 화도읍에 사는 주부 박경미(40)씨는 친환경 식재료를 둘러보고 있었다. 박씨는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어떤 걸 먹이면 좋을지 찾다 보니 슬로푸드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방금 구입한 유기농 표고버섯을 들어 보였다.

다른 한편에선 “찰칵, 찰칵” 사진 촬영음과 함께 깔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흰 벽에 낡은 소파 하나, 괘종시계로 옛날 사진관 느낌이 물씬 나게 꾸민 부스였다. 빨랫줄엔 인화된 흑백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이 행사는 슬로라이프 정신을 5R(Renew·Reuse·Reduce·Recycle·Return)로 집약했는데 그중에서도 과거를 회상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흑백사진을 건네받은 권경희(50)씨는 “흑백사진 자체를 잊고 살았는데 이렇게 인화된 사진을 보니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반겼다.

이 프로그램에는 남양주시에서 음식사진 전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김도성(29)씨가 사진사로 참여했다. 김씨 스스로도 슬로라이프를 추구하며 산다고 했다. 그의 스튜디오는 외곽에 위치한 단독주택 2층이다. 1층에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한때 또래 친구들처럼 도시 삶을 동경한 적도 있지만 가업인 사진관을 이어받아 남양주에 정착한 뒤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말했다.

몇 걸음 더 가니 사람들이 와인 공병의 단면을 사포로 박박 문지르고 있었다. 반으로 자른 와인병의 윗부분을 이용해 양초 받침대를 만드는 체험학습이다. 꽃병과 조명·시계·접시 등으로 탈바꿈한 와인병들도 전시돼 있었다. 권순확(52)씨는 “슬로라이프에 관심이 많다”며 “와인병 재활용법 등 유용한 팁은 꼭 실천하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을 마련한 장석민(54) 에코플럭스 대표에 따르면 연간 국내에 수입되는 와인병은 6000만 병 이상이다. 소주병은 세척해 8번 정도 재사용이 가능하지만 와인병은 한 번 쓰고 버려지기 때문에 자원 낭비가 심각하다. 한국와인협회 업사이클링 분과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한 장 대표는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와인병 재활용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한 편”이라며 “5년 전부터 와인 공병을 활용한 공예사업을 해 오고 있지만 매년 적자다. 언젠간 이 사업의 가치가 알려지고 대중화되길 바라면서 묵묵히 이 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파올로 사투르니니 국제슬로시티연맹 명예회장.

파올로 사투르니니 국제슬로시티연맹 명예회장.

오후 2시 청소년수련관에서는 ‘음식·도시·환경, 그리고 삶’을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다. 강연자 중 1명인 파올로 사투르니니(67)는 슬로시티의 창시자이자 국제슬로시티연맹 명예회장이다. 연맹에는 30개국 236개 도시가 슬로시티로 등록돼 있으며 5년 주기로 재심사가 이뤄진다. 한국의 슬로시티는 남양주·담양·상주·신안·영양·영월·예산·완도·전주·제천·청송·태안·하동 등 13곳이다. 사투르니니는 강연 후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문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며 “항상 행복을 추구하며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슬로시티 창시자 “늘 행복 추구해야”

슬로시티 개념은 언제, 어떻게 만들었나.
“99년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그레베 인 키안티라는 작은 도시에서 시장을 할 때였다. 그레베는 인구 1만4000명의 작은 도시라 세계화 영향이 적었음에도 경제적 기반 산업인 농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무엇보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정체성 등 무형의 문화유산이 사라질까 위기감을 느꼈다. 농산물뿐 아니라 도시의 영혼을 살리고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에 슬로시티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슬로시티란 한마디로 함께 잘 사는 도시다.”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
“96년 이후 여덟 번째 방한이다. 한국 사람들은 어딜 가든 반갑게 맞아 주고 좋은 것은 굉장히 잘 받아들이려 하는 것 같다. 또 뭐든 열심히 하려 한다.”
슬로라이프 실천을 위한 팁이 있다면.
“일단 공기가 좋고 건강한 곳에 살아야 한다. 패스트푸드 대신 깨끗하고 정당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음식을 먹어야 한다. 친환경 재료로 집을 짓고,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타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하는 것도 슬로라이프의 일환이다. 가장 중요한 건 항상 행복을 추구하고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국가가 당신을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하라’는 명언을 남겼다. 문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각자가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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