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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공백 겨우 피했지만 머나먼 협치, 무전략·무능력 드러나 “여야 모두 패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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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호 11면

김명수 대법원장 인준, 각 당 득실은

지난 21일 오후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의원들이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투표를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지난 21일 오후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의원들이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투표를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진통을 겪던 김명수 대법원장 국회 인준안이 지난 21일 가까스로 통과됐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반대 당론을 정한 가운데 자율투표에 나선 국민의당에서 절반이 넘는 찬성표가 나오면서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 지도부는 “협치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분위기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준안 부결에 이어 자칫 사법부 수장 동시 부재라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질 뻔했던 최악의 상황도 피할 수 있게 됐다.

與 정치력 부족, 정국 주도력 의문 #안철수 존재감 과시, 부메랑 우려 #바른정당 갈등 증폭 탈당설까지 #한국당 강경책 중도 외면 비판

하지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정치권 안팎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한계가 뚜렷한 일회성 협치였을 뿐”이란 비판 속에 협치는 여전히 산 넘어 산이다. 정기국회 전망도 안갯속이다. 게다가 인준안 협상 과정에서 전략 부재, 당내 갈등, 정치력 부족 등 여야 각 당의 치부와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향후 정국 운영에 적잖은 부담만 떠안게 됐다는 지적도 적잖다. 의원들조차 “여야 모두 패자”라며 자조 섞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언제까지 석기시대 정치 계속할 거냐”

민주당은 일단 큰 고비를 넘겼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번 인준안마저 부결됐을 경우 향후 정기국회 개혁입법 처리가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당장 지도부 총사퇴가 불가피했을 터였다. 원내 관계자는 “우원식 원내대표도 사퇴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며 “정국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게 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둔 셈”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인준안 처리 과정에서 민주당 지도부의 전략 부재와 무능력이 그대로 노출됐다는 점이다.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의당을 설득하는 과정부터 엇박자를 냈다. 국민의당 중진 의원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협치에 대한 아무런 전략도, 의지도 없이 자신만만한 태도만 보이더니 정작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아이고 형님, 동생’ 하며 팔짱을 끼더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의원도 “그동안 분위기가 좀 좋아질 만하면 어깃장을 놓던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표결 당일 갑자기 살갑게 대하니 도무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며 “당 대표와 원내대표, 의원들 태도는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정작 책임은 우리에게만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민주당은 국민의당 의원들의 찬반 기류를 ○·△·▽·× 등으로 나눈 뒤 주초부터 의원 3~4명이 국민의당 의원 1명을 집중 설득하는 등 총력전을 펼쳤다. 우 원내대표도 투표 당일 국민의당을 ‘협력적 동반자 관계’라고 치켜세우며 “특별한 협조를 마음 다해 요청한다”고 호소했다. 이를 바라본 민주당 중진 의원은 “1980년대 끝난 줄 알았던 ‘○× 담당제’를 다시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언제까지 이런 석기시대 정치를 계속할 거냐”며 고개를 저었다.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인준안 통과 직후 찾아온 우 원내대표에게 “협치는 제도화해야 가능하지 이게 뭐냐”고 쓴소리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의당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안철수 대표의 행보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안 대표 측근들은 최근 안 대표의 존재감이 부쩍 커진 데 대해 고무된 모습이다. 보수 야당이 지리멸렬한 가운데 “지금이 기회”라며 치고 나와 단기간에 ‘문재인 대항마’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는 게 자체 평가다.

하지만 당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당장 제1의 지지 기반인 호남의 반응이 냉랭하다. 호남권 재선 의원은 “호남 유권자들이 바라는 것은 국민의당이 문재인 정부의 개혁 노선엔 적극 협력하고 제대로 못하는 부분은 견인하고 대안을 내면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라는 것”이라며 “그런데 지금 안 대표의 스탠스는 이런 주문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의원은 “안 대표가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를 벤치마킹하는 것 같은데 탄탄한 지역 기반과 세력이 없다는 점에서 성공을 장담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며 “지금의 노선을 계속 고집하다가는 오래 못 가 부메랑을 맞으며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재 국민의당 의원들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뉘어 있다는 게 중론이다. 안 대표 지지와 관망, 비판 기류가 혼재돼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21일 인준안 표결 직전 박지원·정동영 의원 등이 “아예 찬성 당론을 정하는 게 향후 여야 관계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 줄 것”이라며 안 대표의 독자 행보에 첫 제동을 건 데 대해 당내에서는 “향후 호남권 의원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신호탄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10%대 군소정당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

바른정당은 인준안의 직격탄을 맞았다. 투표 전략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당내 자강파와 통합파의 갈등이 또다시 분출되면서다. 인준안 표결을 앞두고 당내 부산 출신 의원들은 자율투표를 주장했다. 하지만 주호영 원내대표와 통합파 의원들의 반대로 결국 반대 당론으로 결정됐다. 한 의원은 “국민의당이 자율투표로 가는 지금이 우리가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이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표결 후엔 자강파인 하태경 최고위원이 “나는 찬성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주 원내대표가 “별난 사람과는 당을 같이하기 어렵다”고 맞받아치면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여기에 한국당과의 공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추석 전 통합파 의원들이 탈당할 것이란 소문까지 퍼지면서 적잖은 후폭풍에 직면하게 됐다.

한국당도 “강경 투쟁으로 전통적 지지층 결집에 효과를 보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지만 역풍에 대한 당내 우려도 만만찮다. 수도권 출신 의원은 “정기국회 개회 직후 장외투쟁부터 이번 인준안 표결까지 문재인 정부 흔들기엔 나름 성과가 있었다지만 지역에 가 보면 중도층 유권자들 여론이 썩 좋지만은 않다”며 “실제로 의원들 사이에서도 ‘이러다 자칫 지지도 10% 남짓한 군소정당으로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많다”고 전했다.

사법부 수장 공백사태라는 초유의 위기는 넘겼지만 정기국회가 순항할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만간 여야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해 유엔 총회 방문 성과를 설명할 계획이다. 민주당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여·야·정 협의체를 본격 가동하는 등 협치의 제도화에 힘을 쏟는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번 인준안 처리 과정에서 여야 각 당의 내공과 한계가 다시금 확인된 데다 당내 갈등이란 변수도 협치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국정 정상화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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