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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아이 캔 스피크' 김현석 감독

중앙일보

입력

'아이 캔 스피크' 김현석 감독 / 사진=라희찬 (STUDIO 706)

'아이 캔 스피크' 김현석 감독 / 사진=라희찬 (STUDIO 706)

[매거진M] 가슴 아픈 역사 문제를 다루되, 웃음과 감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 ‘아이 캔 스피크’(9월 21일 개봉)는 이 어려운 과제를 보란 듯이 해낸다. 언뜻 보면 깐깐한 70대 할머니 옥분(나문희)과 원칙주의 공무원 민재(이제훈)의 유쾌한 영어 코미디 같지만, 그 속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위안부 피해 여성의 증언을 모티브 삼은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있다.

코미디로 역사 문제를 꺼낸 이유? #단도 직입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아이 캔 스피크' 김현석 감독 인터뷰

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스크린에 옮긴 이는 ‘쎄시봉’(2015)을 연출한 김현석(45) 감독. ‘스카우트’(2007) ‘시라노 ; 연애조작단’(2010) 등 늘 사람과 시대를 향한 따스한 시선을 던져 온 그를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프리프로덕션부터 개봉까지 불과 9개월도 안 걸렸는데.
“지난해 대부분을 중국영화계 진출을 준비하며 보냈다. 하지만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논란으로 중국과의 공동 작업이 모두 무산됐다. 공백기가 길어져 다른 작품을 찾던 중, 지난해 말 이 영화를 공동제작한 영화사 명필름으로부터 처음 시나리오(각본 유승희)를 건네받았다. 한번 쓱 읽어봤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 작품은 반드시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더라. 특히, 옥분의 과거사가 밝혀지는 중반부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스피크'

-영어 소재의 코미디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안부 이야기로 변하는 대목이다.
“‘귀향’(2016, 조정래 감독) ‘눈길’(3월 1일 개봉, 이나정 감독) 등 과거를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를 발언했던 작품과 달리, ‘아이 캔 스피크’의 배경은 우리가 사는 현대다. 그 점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옥분이 위안부 피해 여성이란 사실을 내세우지 않는 점, 민재의 시선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바라보는 구도도 무척 신선했다.
무엇보다 옥분이 자신의 의지로 문제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자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어쨌거나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에, 초반부 코미디 수위를 조절하는 부분이 조심스러웠다. 촬영 전 세 달 동안 세 번에 걸쳐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졸속 타결했던 박근혜 정부가 여전히 정권을 잡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글쎄, 그랬다면 아마 더 신나게 개봉하지 않았을까. 그때야말로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시기였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더 재밌었겠는데?
어쨌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좌우 진영을 따지지 않고 분노해야 하는 사안이다. 일본은 늘 책임을 피할 궁리만 하는데,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그런 식으로밖에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재의 직업이 공무원이라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영화의 엔딩에 뜨는 ‘위안부 결의안’에 관한 자막 내용은 일본 그리고 당시 위안부 협상을 이끈 정부를 겨냥한 말이기도 하다.”

 '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 이제훈과의 작업은 어땠나.
“두 배우의 연기 스타일이 무척 다르다. 나문희 선생님은 오랜 TV 경력에도 불구, 형식에 얽매지 않는 자유자재의 연기를 구사한다. 반면 (이)제훈씨는 무척 정확하게 연기하는 편이지. 원칙주의자인 민재 캐릭터가 조금 심심하고 재미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데, 제훈씨가 정말 ‘변태스러울’ 만큼 역할을 잘 소화해줬다(웃음).
준비 기간이 워낙 짧아서 두 배우가 따로 합을 맞출 시간이 없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케미스트리가 나온 것 같다. 마치 처음엔 앙숙이던 옥분과 민재가 점점 서로 공감하게 되는 영화 속 전개와 흡사했다(웃음).”

-옥분이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가 자신의 서러움을 토로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나 역시 무척 좋아하는 장면인데, 숨은 사연이 있다(웃음). 나문희 선생님이 리허설 도중 감정에 젖어 연기하며 산소의 풀을 한 줌 뽑았는데, 산소 자체가 소품이어서 그만 소품 내부가 드러난 거다. 그 순간 선생님의 감정도 함께 깨졌다. 날은 점점 저물어 가는데, 여러 번 다시 찍어도 리허설 때의 덤덤하고 절제된 연기가 잘 나오질 않더라. 다행히 선생님이 감정을 되찾으셨고, 애초 구상했던 콘티를 무시하고 카메라를 고정한 채 연기에만 방점을 두고 찍었다.
확실히 미장센이고 나발이고 간에, 배우의 정확한 연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다(웃음).”

 '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스피크'

-두 배우의 영어 실력은 어땠나.
“영화 속 옥분은 영어를 아예 못해야 하는데, 나문희 선생님은 성우와 라디오 DJ 경력 때문인지 원체 영어 발음이 뛰어나다. L과 R, F와 P 발음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발음한다(웃음). 일부러 서툴게 발음하려다보니 영 어색해서, 나중엔 아예 옥분이 장기간 영어를 독학했다는 설정으로 바꿨다.
제훈씨 역시 짧은 기간 동안 연습한 것치곤 발음이 상당히 좋았다.”

- 비극적인 위안부 문제를 차분하고 사려깊게 연출한 시선이 돋보인다.
“누군가 내게 ‘정석대로만 만들라’고 했으면, 이 영화를 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직설 화법으로 작품의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주제를 에둘러 드러내는 방식이 내 영화의 화법인 것 같다. 광주 출신이었기에 오히려 덤덤하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룰 수 있었던 ‘스카우트’처럼 말이지.
예를 들어, 누가 내게 ‘부모님께 효도합시다’라고 강요하면 먼저 거부감부터 들 거다. 그보다는 영화가 끝나고서 ‘부모님께 전화나 한 번 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영화가 더 좋은 영화인 것 같다. 주제와 영 상관없는 이야기 같아도, 은연 중에 주제를 곱씹게 되는 그런 작품 말이다. 결국 ‘스카우트’를 만들었던 경험이 ‘아이 캔 스피크’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스카우트'

'스카우트'

- ‘군함도’(7월 26일 개봉, 류승완 감독) ‘택시운전사’(8월 2일 개봉, 장훈 감독)처럼, 최근 들어 비극적 역사를 담는 영화의 태도가 무척 중요해진 것 같다.
“맞다. 결국 방식의 문제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분하고 슬프게 되새기는 게 지금까지 영화가 역사를 다루는 정공법이었다면, 어쩌면 이제 좀 더 다른 시각을 원하는 관객들도 늘어나지 않았을까. 역사를 보는 관점도,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의식도 달라지는 만큼,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도 좀 더 유연해져야 할 것 같다.”

-사람 냄새 물씬한,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 오고 있다.
“흠, 물론 내 안에도 따뜻한 면이 있겠지만, 사실 냉혈한에 더 가깝다(웃음). 무엇보다 오글거리는 걸 못 참는다. 따뜻한 정서를 잘못 풀면 오글거리잖아. 그렇기 때문에 ‘건조한 따뜻함’을 선호한다. 캘리포니아 날씨 같다고나 할까? 습하지 않다는 점에서(웃음).”

-반면 SF 스릴러 ‘열한시’(2013) 같은 새로운 시도도 있었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나.
“‘열한시’를 만든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 멜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너무 지겨워져서, 이제껏 가지 않은 길을 가려다 일어난 패착이지(웃음). 더 이상 그런 ‘변신’에 대한 집착은 없다.
다만 시드니 루멧, 스티븐 프리어스처럼 작품에서 ‘장인(匠人)’의 숨결이 느껴지는 감독이 되고 싶다.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을 가진, 그런 창작가로 사는 게 꿈이다.”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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