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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이 말하는 진짜 삶의 시

중앙일보

입력

'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매거진M] 제주의 시인(양익준)이 소년(정가람)을 만나 새로운 감정에 눈뜬다. 소년에게도 자신을 이렇게 보살피는 사람은 처음이다. 시인을 너무 사랑하는 아내(전혜진)는 그런 시인이 위태롭다. 세 사람, 그들의 사랑. 그 사이에서 삶의 순간들과 아름다운 시(詩)가 피어난다.

'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 인터뷰

그 풍경을 ‘시인의 사랑’(9월 14일 개봉, 김양희 감독)은 무척 곰살맞게 그려 보인다. 세상의 모든 흔들리는 존재를 이토록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한국영화를 만난 게 얼마 만인가. 이 영화를 쓰고 연출한 김양희(40) 감독의 눈에 비친 세상은,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제주 시인 현택훈을 보고, 별 탈 없이 안온하게 살아온 시인이 세상의 이면을 경험하는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현 시인처럼 소년 같은 사람에게 강렬한 사랑을 선물하면 어떨까’ 하는 데서 출발했다. 사람은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이나 커다란 일을 경험할 때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시인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고, 지금껏 처절한 사랑 한번 해 보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슬퍼지려 하는 건, 시를 쓰기 위해서다. ‘시 지상주의’에 빠진, 철없는 사람인 거지. 그런 사람에게 진짜 사랑을 던져 주면, 그의 삶과 시는 어떻게 변할까 탐구해 보고 싶었다.”

-그 사랑의 대상을 소년으로 설정했는데.
“그 대상이 여자가 되면, 사랑의 육체적 측면이 강조될 것 같았다. 난 그보다 폭넓은 ‘관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소년을 이야기에 끌어왔는데, 그 목적이 전부인 인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또래들이 지닌 답답한 마음을 생각했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를 떠올렸다. 학교에서 글 잘 쓴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크게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었다. 나도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는데, 남들 눈에도 그렇게 비치는 것 같아 답답했다. 가난하기도 했고. 그 심정을 소년에게 투영했다. 그런 순간, 시인을 만나고, 삶의 새 길을 찾게 되는 거다. 소년의 캐릭터를 만들면서, 내가 그 또래에 느꼈던 답답한 심정을 해소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짠했다.”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

--시인이 소년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건, 그에게서 시의 영감을 얻기 때문이다.
“삶에 고통이 없을 때는 시가 오지 않는다. 그럴 때 시인이 할 수 있는 건,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말의 아름다움을 채집하는 거다. 삶의 이면과 자신만의 고독을 거친 사람들은 담백한 문장으로 처절한 시를 쓴다. 영화 끝에 시인의 목소리로 들리는, 기형도의 ‘희망’ 같은 시가 그렇다.
영화에서 시인은 시를 위해 슬픔을 찾아 나서고, 소년을 만나고, 사랑 속에서 진짜 슬픔을 느낀다. 그 순간, 시는 중요하지 않다. 그 모든 일을 겪고 났을 때 시인은 비로소, 사랑을 뚫고 나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쓴다. 그게 진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결국, ‘삶’과 ‘영화’를 놓고 볼 때 영화감독으로서 당신이 느끼는 바이기도 한가.
“맞다. 첫 장편을 찍는 것을 인생의 목표처럼 느낄 때가 있었다. 2007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졸업하고 10년 가까이 시나리오도 쓰고 영화 스태프로 일하면서 열렬하게 첫 장편을 찍으려 했지만 정작 뭔가 되는 건 없고 답답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일상 속에서 생각할 만한 이야기, 누구나 거쳤지만 잊어버린 경험을 되살리는 드라마다. 특정한 장르영화를 추구하는 게 아니다 보니 상업영화 쪽에서 부름을 못 받았고, ‘난 영화계에서 쓸모없는 존재인가’ 하는 절망을 느꼈다.
그래서 2012년에 삶을 바꿔 볼 생각으로, 혈혈단신 제주로 내려갔다.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차 안에 내 인생을 다 쑤셔 넣고서. 그때는 ‘앞으로 영화 안 해도 좋다’는 심정이었다. 그러고 4년은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뭔가를 찾고 싶어졌다. 그때 현택훈 시인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혼도 하게 됐고, ‘시인의 사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로 만들게 됐다. 제주의 삶이 2기로 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시인과 소년의 사랑을 동성애, 보호의 감정, 영감을 주는 관계 등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 점을 가장 고민했다. 시인이 소년에게 느끼는 감정에는 동성애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게 처음이라 혼란스러운데, 소년이 감수성도 섬세해 시를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된다. 한데 알면 알수록 소년의 처지가 불쌍하고,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생각하며 소년을 위로하게 되는 거다.
중간에, 둘의 관계를 연인으로 확실하게 규정하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는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관계의 모호함을 끌어안는 원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

-그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시인의 아내는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한다.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 캐릭터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남자 시인과 열일곱 살 소년은 내가 잘 모르고, 내가 한참 전에 지난 삶의 시기를 거치는 인물이라 신경을 많이 쓰면서 만들었다. 오히려 아내는 상대적으로 잘 아는 인물이다. 나도 여자고, 마음에 안 드는 건 못 보는 ‘센’ 성격이라(웃음). 그래서 시나리오를 쓸 때 신경을 덜 썼는데 의외로 반응이 제일 좋더라(웃음). 어찌 보면, 아내 역시 자기중심적이고, 잔인한 면모가 있다. 그 역시 이 모든 사건을 통해 어떤 쓸쓸함을 느낀다. 모든 사람이 그 정도 삶의 비애는 지니고 사는 것 아닐까.
그리고 제주에 살다 보면, 영화에서처럼 여성이 중심이 돼서 꾸려 가는 가정이 정말 많다. 제주 4·3 사건(1947~54)의 여파 등으로 남자가 귀하다 보니, 남자가 그냥 있어 주기만 하면, 여자가 아침에 물질하고 낮에 밭일하고 저녁에 집안일 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애들을 키운다. 그래서인지 제주 여자들이 진짜 건강하고 생명력 넘친다. 차기작으로는 그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시인, 아내, 소년 모두 어떤 비극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걸 무척 따뜻하고 귀엽게 바라본다. 삶의 아름다움과 비애가 함께 있는 풍경이라고 할까.
“그게 리얼리티 아닐까. 진짜 삶은, 슬프지만도 웃기지만도 않잖나. 시나리오를 쓸 때도 웃음과 슬픔이 한 신에 같이 있게 하려는 편이다. ‘웃픈’ 정서를 좋아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귀여워하는 것 같다.
“어떤 캐릭터가 귀엽게 느껴져야 그에 동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시나리오를 쓸 때 ‘이 캐릭터 웃긴다, 귀엽다’는 생각이 안 들면 쓰기 어렵다.”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어 줄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은 망가지지 않아.” 극 중 시인이 소년에게 하는 말이다. 결국 시인은 소년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려 한다.
“그런 감정, 누군가를 보호하는 감정을 좋아한다. 그 사람의 인격에는 주변 사람들의 힘이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서른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었다. ‘이제 난 혼자구나’ 생각했는데 주위에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부터 관계의 힘을 믿게 됐다.
이 영화의 시인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안온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거다. 반대로 소년에게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 주변 사람들의 수혜를 받은 시인이 소년에게 그런 사람이 돼 주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그게 시인의 ‘성장’이라 생각했다.”

-영화에 “시인은 대신 울어 주는 사람”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감독은 뭐 하는 사람일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 내가 쓴 시나리오를 보고 여러 사람들이 영감을 얻어 영화에 뛰어들고, 촬영장에서 각자 자신의 일을 하는 거니까. 촬영장에서 배우와 스태프들이 신나서 아이디어를 내고 자기 일을 스스로 챙기는 모습을 볼 때 감독으로서 정말 기쁘다. 마찬가지로 내 영화가 관객의 삶에 어떤 감흥과 영감이 됐으면 좋겠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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