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허무와 퇴폐가 없으면 위선적 삶” 마광수 교수가 남긴 성적 판타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문학이 있는 주말

추억마저 지우랴
마광수 지음
어문학사

지난 5일 극적인 죽음으로 세상을 또 한 번 뒤흔든 마광수(1951~2017) 전 연세대 교수의 유고 소설집이다. 빛의 속도로 빠르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사람들의 충격과 여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간대에 맞춰 세상에 도달했다. 감상적인 회고 조 제목의 소설집 안에는 모두 28편의 짧은 소설이 담겨 있다. 첫 속지 몇장을 넘기면 고인이 그린 그림을 곁들인 다음과 같은 한문 문장이 나온다. ‘浮生若夢(부생약몽) 爲歡幾何(위환기하)’. 떠도는 인생 꿈만 같아라, 기쁨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나라 이백 시의 한 구절이다. 그런가 하면 생전 펴낸 산문집 『섭세론(涉世論, 세상을 살아가는 혹은 건너는 방법론쯤 된다)』에서 고인은 이런 주장을 펼쳤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허무한 것, 적극적인 성적 쾌락 추구로 허무함을 달래며 살자.’ 이번 소설집에 실린 ‘우울한 청춘’이라는 제목의 작품에도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온다. 허무주의는 가장 정직한 삶의 태도, 허무와 퇴폐가 없는 삶은 실은 위선적인 삶.

소설집의 28편은 단 한 편의 예외도 없이, 고인의 인생과 예술 지론, 즉 적극적인 성적 교섭으로 인생의 허무를 그때그때 달래야 한다는 생각에 충실한 모습이다.

당연히 소설책은 지하철 같은 곳에서는 읽기 거북스럽다. 포르노물에서도 보기 어려울 것 같은 극단적인 상상력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금기의 파괴,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은 작가 자신의 성적 판타지 충족이 먼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거침없고 자족적인 느낌이다. 물론 한계는 있다. 쉽게 질리는 포르노의 성애 장면처럼 소설의 성애 장면도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아무래도 감흥이 떨어진다. 이건 고인의 능력 부족 탓은 아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대일 수 없고, 모든 반복은 지겹지 않은가. 고인의 경우 예술에 가해진, 요즘 감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회적 제재로 인해 감수성에 손상을 입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예술가의 고뇌가 줄어드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재생’이라는 작품에 자조적인 고민이 보인다.

“하지만 최근엔 글도 잘 써지지 않는다. ‘3류 야설 작가’, 이제는 그 말이 나에게 딱 어울린다는 생각도 가끔 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기록, 문학사는 그의 편이다. 시대를 앞서 금기에 맞선 선구자 마광수 말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