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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도시라니

중앙일보

입력

벨기에 겐트를 가로지르는 리스강에서 바라본 그라슬레이 거리. 중세 상인조직 길드가 세운 옛 건물이 즐비하다. 유럽 여행의 필수 코스에 빠져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겐트는 유럽의 내로라하는 중세 도시 못잖은 예스러운 풍경을 자랑한다.

벨기에 겐트를 가로지르는 리스강에서 바라본 그라슬레이 거리. 중세 상인조직 길드가 세운 옛 건물이 즐비하다. 유럽 여행의 필수 코스에 빠져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겐트는 유럽의 내로라하는 중세 도시 못잖은 예스러운 풍경을 자랑한다.

유럽의 문화 원형을 엿보고 싶다는 여행자에게는 일단 이탈리아 로마나 프랑스 파리로 떠나라고 추천해왔다. 로맨틱한 중세도시를 물색한다면 체코 프라하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가 괜찮겠다고 이런저런 몇 가지 답을 제시했다. 그런데 중세도시의 원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여행객이 드문 유럽 도시를 혹시 아느냐는 질문에는 주저 없이 말했다. 그런 여행지는 ‘없다’고. 깊이 있고 아름다운 유럽 도시는 죄다 관광객에게 점령됐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9월 초 벨기에의 낯선 소도시 겐트(Ghent)를 여행하고선 판단이 섣불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록달록한 건물 사이에 운하가 연결된 매혹적인 이 중세도시는 여유롭고 한적했다. 그리고 여행객을 반기는 다정한 사람들이 있었다. 무명이 비운이 아니라 행운인 도시, 나만 알고 싶지만 동시에 많은 이가 알아봐 주길 바라는 도시 겐트 여행기를 전한다.

개성있는 파사드(정면)를 자랑하는 겐트의 옛 건물들.

개성있는 파사드(정면)를 자랑하는 겐트의 옛 건물들.

벨기에는 이방인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국어’가 네덜란드어·프랑스어·독일어 3개씩이나 되는 이 나라는 도시 하나에 딸린 이름은 서너 개였다. 이를테면 벨기에 항구도시 앤트워프(영어식 이름)의 프랑스어 이름은 앙베르, 네덜란드어 이름은 안트베르펜이었다. 복잡함이야말로 남한 면적의 3분에 1에 불과한 서유럽의 소국, 벨기에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휘둥그레 떠진 눈은 곧 호기심 가득 찬 시선으로 바뀌었다. 도시를 넘나들면 언어와 문화와 행인의 인상마저 달라졌다. 가위 ‘한데 모인 유럽’으로 부를 만했다.

벨기에 겐트 리스강에 뜬 무지개.

벨기에 겐트 리스강에 뜬 무지개.

벨기에가 이토록 다단한 데에는 다난했던 역사적 배경이 깔려있다. 18~19세기 역사를 돌아보면 벨기에가 1831년 독립을 쟁취하기 전까지 스페인·오스트리아·프랑스·네덜란드가 차례로 이 땅의 주인을 자처했다. 강대국이 벨기에를 호시탐탐 노렸던 이유는 단 하나. 중세 이후로 줄곧 유럽의 무역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물자와 사람이 모여들었던 중세 벨기에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여행지가 바로 인구 26만 명의 겐트라 하겠다. 벨기에 북부 플란더스주에 속한 겐트는 수도 브뤼셀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고, 프랑스어를 주로 쓰는 브뤼셀과 달리 네덜란드어 권역에 들어간다.
겐트는 언뜻 보기에도 상업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겐트에는 두 개의 강이 흐르는데, 리스(Lys)강은 도심을 빙 두르는 지천이다. 리스강이 이어지는 스켈더(Schelde)강은 프랑스 북부에서 발원해 벨기에 네덜란드를 지나 북해로 흘러든다. 물줄기가 거미줄처럼 온 도심을 연결하는 덕분에 작은 배로도 도심 구석구석까지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유리했을 것이다. 실제로 겐트는 교통 이점을 활용해 모직물 유통의 거점으로 발달했다. 13세기에는 인구 6만명이 거주하는, 유럽에서 파리의 뒤를 잇는 부유한 도시이기도 했다.

리스강변의 펍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리스강변의 펍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중세 상인이 바삐 드나들었던 리스강 주변은 현재 겐트 시민과 여행객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 됐다. 강변은 삼삼오오 둘러 앉아 맥주 마시고 수다 떠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겐트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여행법은 물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현지인의 추천을 받아 리스강 보트투어에 나섰다. 구도심 중심에 있는 코렌레이(Korenlei) 선착장에서 10인승 배에 탔다.

배 위에 올라타니 강을 한 가운데 둔 아기자기한 도시의 모습을 한눈에 올려다볼 수 있었다. 강변의 건물은 중세 상회(商會) 길드가 세운 것이 대다수였다. 석공조합, 선원조합 등은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차원에서 길드 건물 외양에 공을 들였다. 덕분에 겐트 구도심 강변은 개성 있는 옛 건물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을 갖게 됐다. 지날 때마다 성직자에게 세금을 내야 했다는 ‘빵(돈)을 잃어버린 다리’, 지반이 불안정해 돔 지붕을 올리지 못한 ‘성미카엘성당’도 동화마을 같은 도시의 풍경을 빚는 데 한몫 했다.

겐트의 명물 보트투어. 도시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물줄기를 따라 도심 구석구석을 볼 수 있다. 가이드가 동행한다.

겐트의 명물 보트투어. 도시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물줄기를 따라 도심 구석구석을 볼 수 있다. 가이드가 동행한다.

리스강 보트 투어는 유능한 디자이너가 설계해 놓은 중세풍 테마파크를 탐험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생각을 들킨 건지 보트투어 가이드 티모시는 “겐트는 박물관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도시”라고 강조했다. 말을 듣고 보니 문화재급으로 보이는 건축물에 ‘출입금지’ 표시가 없었다. 옛 건물은 누군가의 집으로 혹은 펍·레스토랑·호텔로 개조돼 유용한 건물로 쓰였다. 중세 건물 중에는 학교도 많았다. 겐트는 벨기에 대표 대학도시로 대학생 인구만 7만5000명에 달한단다. 겐트가 영화 세트장처럼 차갑지 않고 사람의 활달한 온기가 가득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중세 곡식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레스토랑.

중세 곡식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레스토랑.

중세 곡식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레스토랑.

중세 곡식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레스토랑.

겐트에서 맛볼 수 있는 북해 새우로 만든 크로켓.

겐트에서 맛볼 수 있는 북해 새우로 만든 크로켓.

겐트를 여행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유럽의 내로라하는 중세 도시에 뒤지지 않을 만한 겐트가 한국 여행자 사이에 이토록 알려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일본인, 중국인 등 아시아 여행자도 찾기 힘들었다. 겐트 현지 가이드 알렉스는 “겐트의 역사는 깊지만 여행지로서의 역사는 짧을 것”이라고 말했다. 겐트는 ‘벨기에의 맨체스터’라는 별명처럼 공장에서 뿜는 연기가 자욱한 산업 도시였단다. 제조업이 쇠락하자 1990대 이후 비로소 겐트가 관광도시로 육성됐고, 오수가 흐르던 리스강 수질개선 작업도 병행됐다. 90년대 리스강은 시민들이 근처에 가기도 싫어할 정도로 더러웠지만 현재는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겐트 최고의 여행 루트로 변모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뒤로 겐트의 랜드마크 성바프대성당이 보인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뒤로 겐트의 랜드마크 성바프대성당이 보인다.

‘늦깎이’ 여행지 겐트의 인상적인 점은 또 있었다. 여행자에 대한 환대였다. 지도를 펼치면 어디선가 누군가가 나타나 도움을 줬고 길거리에서 눈을 마주치는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보트를 타는 2시간 동안 국빈이라도 된 것 마냥 팔이 떨어질 만큼 시민들과 손을 흔들었다.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몇몇 유럽 도시에서 여행객으로서 현지인의 싸늘한 시선을 받았던 것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종탑.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종탑.

토, 일요일마다 성야곱거리에서 열리는 플리마켓.

토, 일요일마다 성야곱거리에서 열리는 플리마켓.

플리마켓에서 판매하는 '중고' 엽서.

플리마켓에서 판매하는 '중고' 엽서.

보트에서 내려 15분마다 종이 울리는 종루, 시청사 등이 있는 구도심을 구석구석 걸어서 구경했다. 코렌레이 선착장 맞은편 벨가퀸(belga queen) 식당으로 갔다. 겐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12세기 곡물창고를 개조한 돌집이었다. 창밖으로 어스름이 내린 리스강에 멋스러운 건물이 비쳤다. 5년 후, 10년 후에도 풍경도 사람도 다정한 도시 겐트의 모습을 여전히 볼 수 있길 바랐다.

유럽 소도시 여행⑥ 벨기에 겐트 #여행자를 국빈 모시듯 반기는 도시 #강과 운하에 비친 멋스런 중세 건물 #도심 구석구석 누비는 보트투어도 일품

◇여행정보=벨기에 직항 노선은 없다. 네덜란드까지 이동 후 벨기에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벨기에 겐트역까지 기차로 2시간 30분 걸린다. 편도 80유로(11만원) 정도다. 유럽 기차 패스 유레일(eurail.com)을 이용하면 유럽 내 나라간, 도시간 기차여행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네덜란드·벨기에 등을 여행할 때는 베네룩스 패스가 유리하다. 3~8일 날짜를 선택해서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등 인근 3개국에서 기차를 탈 수 있다. 사용일에는 기차 무제한 승하차가 가능하다. 패스는 사용을 시작한 날부터 한 달간 유효하다. 어른 3일권(2등석 기준) 160유로(21만6000원)부터. 겐트 명물 보트투어(debootjesvangent.be)는 40분·1시간·2시간 코스가 있다. 어른 7유로(1만원), 어린이 4유로(6000원)부터. 10인승 배를 통째로 빌리는 것도 가능하다. 100유로(13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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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트(벨기에)=글·사진 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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