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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벌써’ 40년 … 오래된 청춘, 벼랑 끝 방에 숨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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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호 08면

[정재숙의 공간탐색] 음악가 김창완의 방 

몸을 간신히 누일 만한 작은 침대 외에는 온통 기타와 음악 작업을 위한 설비로 꽉 찬 김창완씨의 방. 그는 이곳을 일러 ‘크레파스 같은 모순의 방’이라 했다. 작은 그림은 익살스러운 연필꽂이. 안충기 기자·화가

몸을 간신히 누일 만한 작은 침대 외에는 온통 기타와 음악 작업을 위한 설비로 꽉 찬 김창완씨의 방. 그는 이곳을 일러 ‘크레파스 같은 모순의 방’이라 했다. 작은 그림은 익살스러운 연필꽂이. 안충기 기자·화가

창작의 산실은 내밀한 처소다. 한국 문화계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작업하는지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했다.

가수·작곡가·탤런트·방송인… #물처럼 흘러가는 곳 따라 달라져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시점 생겨 #막내 창익이가 죽던 그 전날로 #산울림 음악은 낯설고 도발적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종의 방기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그 생산 현장을 깊게 드러내려 사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화가인 안충기 기자는 짧은 시간 재빠른 스케치로 작가들의 아지트 풍경을 압축했다.

이 연재물의 열한 번째 주인공은 음악가 김창완(63)이다. 한국 록의 희귀한 싱어송라이터로 40년째 우리 대중문화의 최전선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낯설고 도발적이며 순수했던 ‘산울림’의 정신을 영원히 견지하겠다는 ‘오래된 청춘’이 오늘도 기타와 한 몸이 돼 노래 부른다.



아니 벌써, 40년이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로 우리 귀를 놀라게 했던 록 밴드 ‘산울림’이 태어난 지 마흔 해가 흘렀다. 유신 말기 대한민국은 듣도 보도 못한 쨍한 노래 ‘아니 벌써’로 펄쩍 뛰어올랐다. 펑크 같은 느낌의 록으로 사람 가슴을 툭툭 치는 기이한 음색과 엉뚱한 가사는 짓궂은 듯 상쾌했다.

장난기 어리면서도 낭랑한 목소리로 “아니 벌써”를 외쳤던 김창완씨는 여전히 몇십 년 전 ‘김창완 아저씨’로 몇 겹 자기 변신에 하루가 모자란다.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탤런트이자 배우이고, 방송인이자 작가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종합 예인(藝人)이라 할 것인데 텔레비전을 켜도, 라디오를 틀어도 그가 늘 거기 있다는 끈질김이 놀랍다. 그는 물처럼 자신이 흘러가는 곳에 따라 달라진다. 틀에 갇히는 걸 저어하며 계속 다른 모습으로 도망 다니는 ‘오래된 청춘’이 그다. 동시대 음악가들이 시간 앞에서 무너져 가는 데 반해 그는 팬들과 나란히 가볍고 조용하게 선들선들 가고 있다.

“맘 가는 대로 많이 하는데 그게 머리가 시키는 것 따르는 것보다 탈이 없어요. 사실 노래하는 게 민망해요. 아무도 안 듣는 노래를 계속해야 할지 처연하죠. 내가 들어도 쑥스러운 노래를 들어 주는 팬이 있어 고맙죠.”

그는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하여’를 마음의 시로 꼽는다.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린 다음,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린 뒤,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우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다가 다시 보고는 예술 이야기, 결국 인생 이야기인 것을 깨달았다.

“자유롭지만 그만큼 힘든 게 예술의 길이라는 걸 자각하게 해 줘서 읽을 때마다 감동해요. 이제는 새를 위해 지울 수밖에 없구나, 비로소 독립하는구나, 떠나는구나 싶은 거죠. 음악을 지워 내야 하는 일도 어렵고, 걷어 내서 삶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도 어렵죠. 요새 내 옛 노래들을 찾아 내 노래들한테 매일 불러줍니다. 굉장히 위로가 돼요. 독백이죠. 내가 안 불러 주면 누가 부르겠어요. 나한테 노래가 상품 이전에 어떤 의미인지 많이 돌아보게 돼요.”

‘노래 인터뷰’라 해도 좋을 만큼 그는 10여 곡의 자작곡을 내리 부르며 “나 아니면 누가 불러 주겠어” 했다. 정재숙 기자

‘노래 인터뷰’라 해도 좋을 만큼 그는 10여 곡의 자작곡을 내리 부르며 “나 아니면 누가 불러 주겠어” 했다. 정재숙 기자

26년째 살고 있는 서울 방배동 집에 그의 작업실 겸 방이 있다. ‘김창완 밴드’와 연습할 때는 수색에 있는 은평음악창작지원센터를 이용하지만 혼자 음악에 파묻힐 때는 이 방이 그의 천국이다. 한쪽 벽면이 숲에 면한 창문으로 널찍하고 조용한 이곳의 실제 주인공은 10대가 넘는 기타다. 친구같이 그의 곁을 지켜준 기타는 이제 몸의 일부처럼 마음을 나눈다. 그는 여기서 하루 몇 시간씩 기타를 안고선 노래에 젖고 곡에 취한다.

“모순 덩어리 김창완의 벼랑 끝의 방이랄까. 이 방에서 나의 모습이란 현실에서 제일 멀리 도망가 있는 상태죠. 가장 편하게 현실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곳, 생각이 진자처럼 흔들리는 곳.”

그에게 방은 현재의 시간을 잊고 심리적 시간을 담는 그릇이다. 시간이 약탈해 가는 상실이나 아픔을 견디기 위해서 그는 방에 파묻힌다. 스스로 정적(靜的)인 인간이라 진단하는 그에게 방은 피난처이자 비밀의 장소이며 창조의 땅이다.

“평생 과거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10년 전부터 딱 한 시점이 생겼어요. 2008년 1월 막내 창익이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죽던 그 전날입니다. 동생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고 나서 정말 많은 것이 변했어요. 나도, ‘산울림’도.”

그는 ‘산울림’ 정신을 무엇이라 정의하겠느냐는 물음에 오랫동안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김창완 밴드’의 젊은 멤버들과 연주하면서 새로 발견하는 것이 너무 많은 광맥이라고 표현했다. 음악 전문가이면서도 연주할 때마다 쩔쩔맬 수밖에 없을 만큼 품고 있는 뜻이 크다고 말했다.

“낯설고 도발적인 것, 도전하면서 밀고 나가는 것, 수많은 시도로 버무려지면서 계속 바뀌어가는 것.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정신이랄까요. 한마디로 산울림 음악은 경향이 없다는 것,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른다는 것, 고착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일종의 방기죠. 다 버리고, 다 지우고 공허한 삶을 마주하며 심심하게 살고 싶어요.”

그는 20년 뒤인 2037년 10월 비무장지대 근처에서 콘서트 여는 스케줄을 잡았다. “그때쯤이면 거기 남북 누구나 설 수 있는 멋진 무대가 생길 겁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창완 체’ 방송 인사말 6000회

김창완의 지인과 팬들은 그가 쓰는 글씨를 ‘창완 체’라 부른다. 또박또박 반듯한 필체는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어우러져 단정하면서도 고소한 인간미를 풍긴다. 컴퓨터를 쓰지 않고 손글씨로 노트에 적어 나간 그의 글은 번들거림 없는 그의 음악과 닮았다. 노랫말을 지을 때도, 에세이를 쓸 때도 그의 ‘창완 체’는 꼬들꼬들 속뜻을 받쳐 준다.

16년째 오전 9시에 시작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이하 아침창)를 진행하는 그는 방송을 여는 인사말을 하루도 빠짐없이 이 손글씨로 직접 쓴다. 아침창이 6000여 회에 달했을 때, 그는 ‘창완 체’로 쓴 글을 가려 모아 『안녕, 나의 모든 하루』를 펴냈다. 인터뷰를 하고 난 다음 날 아침, 그는 아침창을 이렇게 열었다.

“어젯밤 창을 열고 자는데 선선한 바람결에 풀벌레소리가 실려 와요. 저는 모스 부호 주고받는 걸 보거나 들은 적은 없어요. 그런 신호처럼 단속음이 이어지는데 간절한 메시지는 틀림없구나 싶더라고요. (…) 이제 가을이 깊어 갈 텐데 벌써 이런 시구절이 가슴을 후비면 어떡할런지. 진짜 긴 여행이 남은 것 같습니다.”

그는 그림도 그리고 붓글씨도 쓴다. 휴대전화 메시지로 감 4개를 그려 보내곤 이렇게 썼다. ‘감4’.


김창완  
1954년 서울생.

1977년 김창훈, 김창익 두 남동생과 록 밴드 ‘산울림’을 결성해 70년대 한국 대학가와 대중문화판에 음악으로 세대 혁명을 불러온 대표 뮤지션.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내 마음’ 등 록 특유의 감각적 자유와 비상한 파격으로 쇠잔해 가던 청년문화에 긴장감과 창의성을 불어넣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연기와 방송 쪽으로 영역을 넓혀 변신의 폭을 가늠할 수 없는 전천후 예인의 면모를 자랑한다. 막냇동생의 타계 뒤 자연스레 ‘산울림’이 해체되고 나서 젊은 연주자들과 만든 ‘김창완 밴드’로 여일한 산울림의 메아리를 퍼트리고 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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