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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강림한 한국 페미니즘 대모의 부흥회 … 그녀는 자꾸 같은 질문만 받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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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DEEP INSIDE │ 신조어‘맨스플레인’ 유행시킨 리베카 솔닛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140석 예정 강연회 800석으로 늘려 #90% 이상이 젊은 여성 열렬한 환호 #솔닛, 성소수자 등 모든 비주류 옹호 #20권 책 중 여성문제 다룬 건 2권 #한국 ‘메갈리아 논쟁’ 때맞춰 등장 #페미니즘 경전 수준으로 각광 받아 #미국서 가져와 들고 다닌 텀블러 #일회용품 안 쓰겠다는 의지 표현

‘맨스플레인(Mansplain·Man+Explain의 합성어)’이라는 신조어로 페미니즘의 간판이 된 주인공이 있다. 리베카 솔닛(56). 미국인 에세이스트다. 솔닛이 지난달 24∼28일 처음 방한했다. 그의 방한에 맞춰 신간 1권과 개정판 2권도 동시에 출간됐다. 특히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이하 ‘여자들’)는 미국에서 출간된 지 5개월 만에 국내에서 번역판이 나왔다. ‘여자들’은 2015년 국내에 소개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이하 ‘맨스플레인’)의 후속작이라고 출판사 창비는 소개했다. 페미니즘을 다룬 내용은 맞지만 원제 ‘The Mother of All Questions(모든 질문의 어머니)’는 사뭇 다르다.

솔닛은 서울에서 공식행사 4개를 치렀다. 기자간담회·강연회 등 솔닛이 나타날 때마다 열렬한 호응이 뒤따랐다. 때로는 우아한 모습으로, 때로는 단호한 모습으로(강연회에서 욕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를 응원했다.

[그림=안충기 기자·화가]

[그림=안충기 기자·화가]

◆대모의 부흥회=지난달 25일 오후 7시 30분 서울 건국대 새천년관 대공연장. 솔닛 강연회 객석 800석이 꽉 찼다. 강연회를 준비한 창비와 알라딘은 원래 140석 규모의 강연회장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신청자가 1400명이 넘자 대형 행사장으로 급하게 바꿨다. 객석의 90% 이상을 젊은 여성이 차지했다.

강연회에서 그는 원고를 읽었다. ‘만약 내가 남자라면(If I were a boy·미국 팝가수 비욘세의 노래 제목과 같다. 솔닛은 여성주의적 가사를 노래하는 비욘세를 좋아한다고 진즉에 밝힌 바 있다)’이라는 제목이었다. 원고를 읽자마자 질문이 쇄도했다. 모두 10개 질문 가운데 9개가 페미니즘과 관련한 것이었다. 페미니즘에 관한 질문은 그러나 솔닛의 작품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 여성이 침묵을 깨고 말을 하기 시작한 최근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더 큰 변화로 이어갈 수 있을까요?”

“남성 페미니스트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자신 안에 내재된 여성혐오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요?”

‘닷페이스’라는 국내 여성주의 SNS 매체는 이날 행사를 ‘리베카 솔닛 대모님이 한국에 강림하셨다!’고 소개했고, 강연회를 준비한 창비와 알라딘은 ‘부흥회’라는 단어로 강연회를 알렸다. 이날 오전의 기자간담회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여성 전문 매체 기자들이 “한국의 페미니스트에게 주는 연대의 메시지”를 요구하거나 “강고한 남성연대를 깨뜨리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요청했다.

솔닛도 성실히 답변을 이어갔다. 이를테면 “우리는 계속 승리하고 있다”고 강조했고 “페미니즘의 성장은 남성의 반발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계속되는 지침 요구에 지쳤는지 강연회에서는 이런 대답도 했다. “사실 제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럭 척해야만 하는 자리인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솔닛은 모두 20권의 책을 냈다. 예술·환경·인권·여성 등 관심 분야가 다양하다. 솔닛의 방대한 저작 중 페미니즘 관련 저작은 ‘맨스플레인’과 이번에 출간된 ‘여자들’ 두 권 뿐이다. 그럼에도 솔닛은 한국에서 페미니즘의 대모로 불린다. 미국에서도 솔닛은 페미니즘 작가로 구분되지만 출판사 홍보문구처럼 ‘미국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의 프로필에서도 페미니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솔닛을 페미니즘의 경전으로 소비하는 현상은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이다.

◆한국에서 솔닛이 소비되는 방식=솔닛은 어느 날 갑자기 유명 페미니스트가 됐다. 2008년 그는 ‘톰디스페치’라는 대안 블로그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en Explain Things To Me)’는 제목의 원고를 기고했고, 이 원고는 ‘이전에 쓴 어떤 글과도 비교과 안 될 만큼 널리 퍼졌다(‘맨스플레인’ 27쪽)’. 솔닛이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를 고안한 주인공은 아니다. 남자들이 무턱대고 여자들에게 설명하려 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이 신조어는 그러나 솔닛의 글 덕분에 탄생했고 뉴욕타임스가 꼽은 2010년 올해의 단어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화제가 됐다. 솔닛은 이 글을 포함한 9꼭지의 에세이를 묶어 2014년 첫 페미니즘 책 ‘맨스플레인’을 펴냈다.

‘맨스플레인’이 국내에 소개된 2015년. 한국사회는 이른바 ‘메갈리아’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메갈리아는 ‘메르스’와 ‘이갈리아의 딸들(성역할이 바뀐 가상의 세계 이갈리아를 그린 소설 제목)’의 합성어다. 2014년 메르스 파동 때 메르스 의심 여대생 두 명이 홍콩에 여행을 간 일이 발단이 돼 인터넷에서 여성혐오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한 인터넷 사이트에 ‘메르스 갤러리’라는 커뮤니티가 생겼고 이 커뮤니티는 여성혐오를 혐오하는 온라인 활동을 벌였다. 이들이 메갈리아다.

메갈리아의 주요 활동이 이른바 ‘미러링’이었다.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방식 그대로 여성도 남성을 공격했다. 남성이 여성을 가슴 크기로 비하하는 것처럼 그들은 남성의 성기 크기로 남성을 조롱했다. 남성이 지배하는 언어구조와 비유방법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바로 이 미러링 작업에서 솔닛이 적극 인용되었다. 솔닛의 ‘맨스플레인’은 결국 남성에게 빼앗긴 여성의 언어(또는 발언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솔닛의 글쓰기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을 포착해 사회적 맥락(또는 여성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사회적 정의(또는 여성적 정의)를 내리는 방식을 고수한다. 그래서 솔닛의 글은 쉽다. 주장이 분명한 글이 쉬우면 파급력도 커진다. 한국의 페미니스트에게 솔닛의 ‘맨스플레인’이 경전처럼 소비되는 까닭이다.

한가지 요인이 더 있다. 솔닛은 이제 주류 언론에도 글을 쓰지만 주요 활동 무대는 여전히 인터넷 블로그나 인터넷(또는 SNS) 대안매체다. 국내 페미니스트의 트위터 해시태그 운동도 솔닛을 비롯한 서양 페미니스트의 온라인 활동에서 빌려왔다.

◆솔닛의 텀블러=말하자면 솔닛은 ‘비주류’ 운동가다. 솔닛은 성소수자·여성·유색인종 등 세상의 모든 비주류를 옹호한다. 저작을 통틀어 두드러지는 주제는 페미니즘보다 인권이다. 특히 성소수자 문제를 언급할 때 그의 글은 통렬하다. 이를테면 ‘내 친구 에마는 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결혼식에 입장했는데, 그 뒤에는 그 아버지의 남편이 에마의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들어왔다(’여자들‘ 24쪽)’는 구절은 성 소수자의 일상을 묘사한 가장 짜릿한 문장이었다(에마의 아버지가 동성애자라는 뜻이다).

솔닛은 비주류 중에서도 행동하는 비주류다. 이번에 개정판이 나온 『어둠 속의 희망』에서 솔닛은 자신을 행동가(activist)라고 소개한다(325쪽). 행동가 솔닛은 환경운동에서 가장 활발했다. ‘맨스플레인’에서 인용되는 『River of Shadows』가 미국 서부의 난개발을 비판하는 내용이다(수상기록이 가장 화려한 솔닛의 저작이다). 반정부 시위도 그의 주요 활동이다. 『어둠 속의 희망』은 미국에서 2004년 출간됐다. 2001년 9·11사태 이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부시 정부가 재선에 성공하자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자며 지은 책이다. 그는 시애틀 WTO 반대시위에서 바리케이드를 쳤고 네바다 핵 실험장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솔닛의 대학전공은 영문학과 미술사다. 솔닛의 프로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력도 미술관 도록 제작이다. 그의 전공은 그의 인문학적 글쓰기와 관계가 있다. 그의 글은 수많은 사상가와 작가의 문장을 스스럼 없이 부린다. 압권이 이번에 개정판이 나온 『걷기의 인문학』이다. 장 자크 루소,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개리 스나이더, 발터 벤야민 등 인용되는 면면이 화려하다. 책에서 솔닛은 걷는 행위를 진보로 이해한다. ‘여자들’에서는 흥미로운 영화 비평도 등장한다. 록 허드슨, 제임스 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출연한 할리우드 고전영화 ‘자이언트(1956)’에서 솔닛은 놀랍게도 동성애적 서브텍스트를 끄집어낸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사회 상황에 따라 해석된다. 한국에서 솔닛이 페미니즘의 경전으로 소비된다고 해서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다만 말하고 싶은 지점은 있다. 솔닛은 방한기간 내내 텀블러를 갖고 다녔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의지를 텀블러로 표현한 것이다. 확인해보니 역시 미국에서 갖고 온 것이었다. 나는 솔닛의 유려한 말과 칼칼한 글보다 저 낡은 텀블러가 더 인상에 남았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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