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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문자 예술로 맛보는 긴 여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46호 32면

시는 짧다. 산문과 비교하면 그렇다. 짧기에 쉽고도 어렵다. 얇은 시집을 들었을 때 심리적 부담이 덜하기도 하고, 응축된 시인의 상상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도 하다.

『시를 읽는 오후』 #저자: 최영미 #출판사: 해냄 #가격: 1만5000원

최영미 시인이 이 쉽고도 난해한 시 세계의 안내자로 나섰다. 그가 웃으면서, 때로 눈물지으면서 읽은 ‘세계의 명시’ 44편을 골라 책으로 엮었다. 시인은 작가의 말을 통해 “시는 가장 짧은 문자 예술. 우리의 가슴속 허전한 곳을 건드리는 노래. 가볍게 날아다니다가도 심오하게 파고드는 이야기”라며 “좋은 시를 알아보는 눈이 늘어나길 빈다”고 전했다. 한글 번역본과 영시를 함께 올려 번역 과정을 설명하며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어떤 이야기든 사람 이야기가 가장 재밌다고 하지 않던가. 시인을 알아야 시가 더 풍성하게 읽힌다. 저자 역시 “새로운 시인을 연구할 때 제일 먼저 생몰 연대와 탄생ㆍ사망 장소, 배우자의 숫자와 함께 산 기간을 확인한다”고 서술했다. 일례로 저자의 오늘날을 만들었다는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의 이야기를 보자. 기원전 600년경에 레스보스(Lesbos) 섬의 항구 미틸레네에서 태어난 그는 오늘날의 서정시를 발전시킨 가장 큰 공로자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사포의 시 중 서정성이 빛나는 질투의 시 한 편이 있다. ‘그는 내게 신처럼 보여(To me he looks godlike)’라는 제목의 시 일부를 발췌하자면 이렇다.

‘그는 내게 신처럼 빛나 보여, 네 앞에 마주 앉은 남자, 달콤한 너의 말에 귀 기울이며 / 너의 매혹적인 웃음이 흩어질 때면 내 가슴이 가늘게 떨리네. (중략)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몸이 떨리네 나는 마른 풀처럼 창백해지고 죽을 것만 같아….’

그러니까 시인이 열중하고 있는 상대는 그가 아니라 그 앞에 앉은 그녀다. 저자에 따르면 사포는 동성애를 시어로 표현한 아주 특별한 여성이었다. 그가 태어난 섬의 이름을 따서 ‘레즈비언(lesbian)’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내 기분을 대변하는 시를 만났을 때 위로 받기도 한다. 긴 말보다 짧은 시구의 강렬함이 큰 덕이다. 사건사고는 늘 터진다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 상반기 국내 정세는 몹시 뒤숭숭했다. 저자는 최순실 사건이 터졌을 때 이 시를 곱씹었다고 한다. 늦깎이 미국 시인 윌리스 스티븐슨의 ‘바보 같은(Gubbinal)’이다. 시인은 변호사로 일했고, 시인으로선 아주 드물게 50세 이후에 최고 작품을 생산했다.

‘저 이상한 꽃, 태양, 네가 말한 그대로이지. 네 맘대로 해./세상은 추하고, 사람들은 슬프다./저 밀림에 쌓인 깃털들, 저 동물의 눈, 네가 말한 그대로이지./저 사나운 불꽃, 그 자손들, 네 맘대로 해./세상은 추하고, 사람들은 슬프다.’ 저자가 꽂힌 시구는 ‘세상은 추하고, 사람들은 슬프다(The world is ugly, And the people are sad)’이다.

함축된 시구를 읽다 보면 상상력이 필요할 때가 많다. 추상적인 표현 속에 어떤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다. 대담한 이미지로 시작하는 덕에 저자가 처음 접했을 때 충격 받았다는 시 ‘미친 여자의 사랑 노래(Mad Girl’s Love Song)’도 그렇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알려졌고 쟁쟁한 영국 시인 테드 휴스와 결혼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실비아 플라스의 시다. 첫 구절이 강렬하다. ‘내가 눈을 감으면 모든 세상이 죽어서 떨어지지; 눈꺼풀을 들어올리면 모든 게 다시 태어나지(내 머릿속에서 널 만들어낸 것 같아).’

여자는 연인과 이별 후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뜨고, 상상과 현실을 오간다. 가장 짧은 문자 예술을 곱씹을수록 여러 감정들이 숱하게 교차한다. 읽는 속도를 점점 늦추게 하는 책이다.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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