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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탄생, 그 숨은 디테일의 기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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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호 32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지는 작품이 있다. 감독이 창조해낸 세계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몇 차례 관람으로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다. 팬덤을 형성하거나 작가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하는 경우도 여기 속한다.

『아가씨 아카입』 #저자: 김영진 등 9인 #출판사: 그책 #가격: 4만3000원

『아가씨 아카입』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2016)에 대한 공식 메이킹북이다. 어떻게 기획했는지부터 제작 과정, 등장인물론과 작품론, 개봉과 그 이후의 상황까지 아우른 ‘종합 해설서’다. 아울러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리를 짜내고 힘을 모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비하인드 더 씬(Behind the scene)’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아카입’은 기록이라는 뜻의 아카이브(archive)를 ‘아가씨’의 운율에 맞추려는 감독의 의도가 만들어낸 조어다).

필진이 무려 9명에 달한다. 박찬욱 감독은 물론 영화 평론가(김영진·김수빈·조재휘), 문학 평론가(신형철), 잡지 편집자(장윤성), 영화잡지 기자(김혜리·정지혜), 타이포그래퍼(유지원)가 보여주는 시각은 기록집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들은 원작소설을 읽고 영화화를 제안한 임승용 대표부터 제작 전반을 조율한 네 명의 프로듀서(윤석찬·김종대·정원조·이유정), 아홉 명의 디렉터(미술 류성희·분장 송종희·의상 조상경·조명 배일혁·촬영 정정훈·시각특수효과 이전형·음악 조영욱·사운드디자인 김석원·편집 김상범), 그리고 제작진(각본 정서경, 일본어 대사교육 타카기 리나·이즈미 지하루, 포스터 디자인 김혜진, 홍보와 마케팅 이윤정·강효미, 해외판매와 영화제 최윤희·김하원)을 만나 남길 만한 이야기를 추려냈다. 그 ‘뒷풀이 담화’가 호들갑스럽고 경박한 자화자찬에 머물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영화에 관한 관객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다양한 비주얼 자료의 삽입은 아카이브의 기본일 터. 박 감독으로부터 “난, 너로 정했다”라는 말을 끌어낸 신인 배우 김태리가 숙희 오디션에서 요구받았다는 영화 ‘박쥐’에서 태주(김옥빈)의 대사를 직접 읽으며 현장을 상상하고, 해외 촬영 68회라는 예정 스케줄에 딱 맞춰 마쳤을 정도로 정교한 스토리보드로 유명한 박 감독의 스토리보드를 직접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박 감독 특유의 탐미적 공간을 제대로 구현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기술상에 해당하는 벌칸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던 류성희 미술감독은 세트장을 만들면서 “아름다워야 했고, 기괴함 속에서도 품위가 있어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영화의 공간에 다양한 상징 언어를 담아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히데코와 숙희의 방 사이에 있는 미닫이 문의 벽지다. 당초 이 벽지에는 파도를 그렸다. 두 여주인공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탈출해가는 엔딩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 감독은 파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여겼고, 류 감독은 그림을 보름달로 교체했다. 미닫이 문의 특성을 이용해 열린 문을 닫으면 2개의 반달이 합쳐져 만월이 될 수 있도록, 두 여주인공의 일체감을 강조한 것이다.

가상의 시공간이지만 실제처럼 보여야하는 만큼, 작은 소품 하나까지 신경 쓴 대목은 놀랍다. 마지막 장면에 잠깐 등장하는 블라디보스톡행 티켓과 주인공들의 여권 및 여권 사진이 대표적이다.

조상경 의상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히데코의 초록 드레스에 대해 일화다. 박 감독은 ‘박쥐’를 하면서 태주의 원피스를 블루가 아닌 그린 계열로 만들어주길 바랐지만 당시엔 이를 무시했다. 색의 잔상이 오래 남아 보라색으로 보이거나 질감에 따라 전혀 다른 색감으로 보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김민희의 피부 톤에 맞춰가면서 초록색 드레스를 제작했고 “감독님에 대한 내 나름의 빚을 이렇게 턴 것 같다”고 후련해한다.

제작진의 자부심은 어느새 독자에게로 옮겨진다. “뜨거운 가마 앞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성심성의껏 빚어내 완성시킨 작품이다. 과정에서 맘에 들지 않아 몇 번을 깨트렸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그 덕분에 정말 한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자기가 탄생한 것 같다”는 김종대 PD의 말에는 그런 자부심이 오롯이 담겨있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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