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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 그림, 도시 살릴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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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호 14면

부산에는 무려 40개의 벽화마을이 있다. 사진은 사하구 감천동 벽화마을.

부산에는 무려 40개의 벽화마을이 있다. 사진은 사하구 감천동 벽화마을.

통영에 가면 꼭 해야 하는 게 있다.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천사 날개를 찾아 인증 샷을 찍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국내 여행에서 벽화마을 사진찍기가 필수코스가 됐다. 도시 재생이라는 명분과 관광객 유치 효과에 힘입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들풀처럼 번져가고 있는 벽화마을. 조만간 한국의 모든 골목과 건물벽은 벽화로 뒤덮일지 모른다. 당장 지금부터 두 달 후면 서울역 뒷길 청파로의 회색벽에도 벽화가 그려진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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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는 무려 40개의 벽화마을이 있다.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리는 사하구 감천동 벽화마을은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 할 것 없이 인파로 넘친다. 필자는 겨울에 방문했는데 택시 기사님은 “거를 뭐할라꼬 그리 가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6·25 때 피난민이 모여 살던 안창마을에서 2009년 시작된 벽화마을이 사상공단 벽화마을, 경성대 벽화거리, 보수동 벽화골목과 감천동에 이르기까지 8년도 안 되어 40개를 넘어선 것이다. 검색창에 ‘벽화마을’이라고 쳐보면 부산뿐 아니라 여수·전주·군산·통영·청주·김포 그리고 창원 가고파꼬부랑길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의 벽화마을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

당연히 서울에도 있다. 그런데 해바라기 그림과 ‘잉어 계단’으로 유명한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은 소음과 낙서를 견디지 못한 주민들의 벽화 훼손으로 이슈가 되었고, 서태지 9집 앨범 커버와 동일한 소녀가 그려져 있던 소격동 벽화도 같은 이유로 한 달 만에 깔끔하게 사라졌다. ‘재개발’을 기대했던 주민들이 “소방차도 못 들어오는 판자집 담벼락에 그림이나 그려주는 도시재생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며 실망하여 마을을 떠나는 사례도 있었다.

어디에 뭘 그릴지 토론 과정 있어야 맥락 구축돼  

필라델피아 시당국은 키쓰 해링의 ‘젊은 우리(We The Youth)’ 벽화를 두 차례에 걸쳐 복원했다

필라델피아 시당국은 키쓰 해링의 ‘젊은 우리(We The Youth)’ 벽화를 두 차례에 걸쳐 복원했다

프랑스의 쇼베 동굴이 말해 주듯 벽화는 인류 최초의 미술 양식이다. 그래서 ‘벽화 예술(mural art)’이 아닌 ‘담벼락 그림’ 수준에 머물고 있는 벽화마을 사업이 더 못마땅해 보인다. 관 주도의 벽화 사업은 1920년대 멕시코 벽화운동이 시초라고 한다. 30년대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미국의 뉴딜 정책에도 ‘연방 예술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벽화제작 사업이 있었다. 멕시코의 경우는 국가의 역사적 정체성 확립이 목표였고, 미국은 미술가들의 일자리 창출을 노렸다.

‘세계의 벽화 수도’라는 별명을 가진 도시가 있다. 바로 필라델피아다. 84년 도시 내 그라피티(graffiti)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시작한 필라델피아의 벽화사업은 1996년부터 ‘뮤럴 아츠(Mural Arts)’라는 프로그램으로 본격화되었고 지금은 4000개가 넘는 ‘괜찮은’ 벽화를 가진 도시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어찌나 인기가 있었는지 벽화제작을 총괄했던 제인 골든을 차기 시장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이 있을 정도다. 2007년 영국 찰스왕세자 부부가 보러 가는 바람에 유명해진 두 시간짜리 벽화투어도 있고, 매년 연차 보고서도 발간한다. 2016년에는 79개 프로젝트에 250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했고 임금으로 총 190만 달러가 지급됐다.

필라델피아 벽화예술 프로그램의 벽화제작 과정은 예술가 선정부터 벽 선정, 예산편성, 주민 의견수렴, 디자인, 벽 보수 및 준비, 벽화제작, 완성 및 제막식에 이르기까지 8단계의 절차로 진행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수많은 예술가의 소통과 주민들의 참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느 벽에 어떤 벽화를 그릴 것인지 꼼꼼히 토론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하나의 ‘정체성 있는’ 벽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체 모를 천사 날개와 어린 왕자, 그리고 심지어 르누아르와 고흐 그림 벽화를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참고로 필라델피아 북부에는 재키 로빈슨 등 운동선수 벽화가, 남부에는 프랭크 시내트라 같은 가수들의 벽화가 많다. 맥락상실과 개성상실로 요약되는 우리 벽화마을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복원할 가치가 있는 벽화인지 따져볼 때가 온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80년대 시작된 우리나라 벽화제작 프로그램의 목적은 지역 정체성 표현과 환경 미화였다고 한다. ‘문화나눔 실천의 해’로 지정된 2006년부터 시행된 ‘아트인시티’와 후속 ‘마을미술 프로젝트’의 사업목적에는 사회 양극화 해소가 추가되었다. 애초의 원대한 목적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방도시 관광의 활성화에 기여한 것은 인정한다. SNS를 도배하고 있는 벽화사진들이 이를 증명한다.

도시재생의 가장 빠르고 손쉬운 수단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벽화 만능주의’를 무작정 비난할 생각도 없고,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벽화 지우기 프로젝트’에 큰 힘을 실어줄 생각도 없다. 하지만 30년 벽화마을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서둘러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흉물이 되어버렸거나 되어 가고 있는 벽화들의 복원 혹은 제거다. 필라델피아 시 당국은 키쓰 해링(Keith Haring)의 ‘젊은 우리(We The Youth)’ 벽화를 두 차례에 걸쳐 복원했다. 메그 샐리그만(Meg Saligman)의 ‘필라델피아 뮤즈’도 마찬가지다. 복원에도 상당한 돈이 들어가므로 ‘복원할 가치가 있는 벽화’만 복원한다. 복원할 가치가 없는 벽화는 그냥 깨끗이 지우면 된다.

뉴욕 하이라인 철길공원에서 가장 사랑받던 벽화인 코브라의 ‘키스’는 작년에 갑자기 사라졌다.

뉴욕 하이라인 철길공원에서 가장 사랑받던 벽화인 코브라의 ‘키스’는 작년에 갑자기 사라졌다.

벽의 주인은 벽화를 지울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지웠다가는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뉴욕 하이라인 철길공원에서 가장 사랑받던 벽화인 코브라(Kobra)의 ‘키스’는 작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흑흑! 그러니까 맘에 드는 벽화가 있으면 바로바로 사진을 찍어 두셔야  합니다).

지난 7월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뮤럴 이스탄불 페스티벌(Mural Istanbul Festival)’이라는 이름의 벽화 축제가 열렸다. 테러 위험 등으로 떠난 관광객들을 되돌리기 위해 2012년 시작한 이 축제는 반응이 좋아 매년 여름 개최되고 있다. 도시를 ‘재생’, 즉 다시 살리는데 벽화가 도움이 된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된 것이다. 때마침 국내의 벽화 상당수가 수명을 다하여 재정비를 기다리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입증된 우리의 벽화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왔다. ●

김상훈 :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미술경영협동과정 겸무교수. 아트 마케팅, 엔터테인먼트 마케팅 등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마케팅 트렌드와 기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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