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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워킹맘 다이어리

놀이터가 필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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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수련 기자 중앙일보 산업부장
박수련 이노베이션랩 기자

박수련 이노베이션랩 기자

“갑자기 왜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어요? 거기서 누가 논다고?”

어르신이 호통을 쳤다. 동 주민센터 회의실에 긴장감이 돌았다. 버려진 땅을 다듬어 어린이 놀이터로 만드는 설계안을 주민에게 설명하던 구청 공무원은 진땀을 흘렸다. 예정 부지 앞 거주민들은 “모여서 놀 공간이 생기면 비행 청소년들과 술판 벌이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러워질 것”이라고 혀를 찼다. 무시해선 안 될 고민이다. 하지만 코앞에 동네 아이들이 있는데 “누가 논다고 놀이터를 만드느냐”는 반응엔 한숨이 나왔다.

걸어서 30분 내 거리에 놀이터가 없는 동네, 여기에 사는 워킹맘인 것이 죄다. 주말마다 옆 동네 놀이터와 유료 키즈카페를 순례하며 살았다. 구청에서 놀이터를 만든다기에 모처럼 세금 낸 보람을 느꼈건만…. 게다가 뉘 집 자식이든 그 ‘비행 청소년’이 되지 않는다는 법 없다. “10대 청소년들이 엉뚱한 곳을 헤매고 다니느니 놀이터에라도 모이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대도시 일반 주택가 아이들은 집 밖에서 ‘놀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국내 가구의 48%가 사는 아파트는 놀이터 설치가 의무라 좀 낫다. 그나마 틀에 박힌 놀이기구로 채운 곳이 대부분이다. 열 살만 넘어도 놀이터는 유치하고 지루한 곳이 되고 만다. 학업 스트레스가 심한 한국 청소년들에게 놀 시간이 넉넉해진다 해도, 안전하고 신나게 놀 곳이 없는 게 현실이다.

답답해서 자료를 뒤적여 봤다. 우리 동네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아동구호 NGO ‘세이브 더 칠드런’의 놀이터 개선 프로젝트를 담은 책 『놀이터를 지켜라』에 따르면 놀이터 개선 예정 지역의 일반 주민 중엔 ‘(놀이터는 됐고) 운동기구나 갖다 놓으라’는 반응이 많았다. 야간 소음, 비행 청소년, 고기 굽는 취객에 대한 우려도 만만찮았다.

하지만 멀쩡한 놀이터가 생기고 나선 달라졌다. 마을 전체에 활기가 돌았다. 놀이터가 아이들만을 위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가 놀이터에서 살아난다. 독일에선 동네에서 목이 가장 좋은 곳에 놀이터를 만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저출산 문제를 좀체 풀지 못하던 정부가 이번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확대 개편한다고 한다. 사는 동네와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노는 수준’의 격차마저 계속 벌어지면 부모들은 아이 키울 자신이 더욱더 없어진다. 위원회가 이런 부분까지 헤아릴 수 있는 혜안을 발휘하길 바란다.

박수련 이노베이션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