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호 북한 외무상,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듯이 핵위협이 있는 곳에는 핵억제력이 나오기 마련"

중앙일보

입력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 차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7일 저녁(현지시간) ARF 회의장을 빠져나와 마닐라 시내의 숙소로 들어가고 있다. 앞서 리 외무상은 이날 ARF 참석 관련해 기자회견을 할 것으로 알려져 취재진이 숙소에 기다렸으나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숙소로 들어갔다. [연합뉴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 차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7일 저녁(현지시간) ARF 회의장을 빠져나와 마닐라 시내의 숙소로 들어가고 있다. 앞서 리 외무상은 이날 ARF 참석 관련해 기자회견을 할 것으로 알려져 취재진이 숙소에 기다렸으나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숙소로 들어갔다. [연합뉴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7일 핵·미사일 개발의 책임을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에 돌리며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에서 미국의 군사적 침공을 효과적으로 억제하자면 미국의 심장부를 겨냥할 수 있는 대륙간 타격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 측 대표단이 취재진에 배포한 연설문에 따르면 이 외무상은 이날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비공개 토론에서 “미국이 끝내 군사적으로 덤벼든다면 핵전략무력으로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줄 준비가 돼 있다”며 이처럼 말했다. ARF는 북한이 참석하는 유일한 역내 안보 협의체다. ARF 비공개 토론에서는 모든 장관에게 발언 기회가 있다.

이 외무상은 미국 탓을 하는 데 연설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그는 “조선반도 핵문제는 철두철미 미국 때문에 생겨난 문제”라며 “미국의 가중되는 적대시정책과 핵위협에 처음부터 핵으로 맛서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노력에도 미국은 우리 제도를 전복시키려는 갖은 시도를 중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듯이 핵위협이 있는 곳에는 핵억제력이 나오기 마련”이라며 “핵으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은 핵무기가 이 세상에 출현한 후 전 기간의 역사를 통해 증명됐다”고 주장했다. 또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투명하게 해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는 우리의 능력을 보여줘 미국의 전쟁도발을 억제하려는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며, 지난 7월 4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 우리는 이 길에서 최종 관문을 넘어섰으며 미 본토전역을 우리의 사정권 안에 넣었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줬다”고 말했다. “미국이 끝내 군사적으로 덤벼든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차근차근 보여준 핵전략 무력으로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으름장도 놨다.

그러면서 이 외무상은 “우리는 책임 있는 핵보유국, 대륙간탄도로켓보유국”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반공화국 군사행동에 가담하지 않는 한 미국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는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핵무기로 위협할 의도가 없다”고 이유를 댔다. 또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핵위협이 근원적으로 청산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핵과 탄도로켓을 협상탁에 올려놓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선택한 핵무력 강화의 길에서 단 한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협상 거부 입장을 재확인했다.

국문으로 8페이지에 이르는 연설문에서 이 외무상은 한국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 언급했다. “미국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생존방식으로 하고 있는 일본과 남조선 당국에 대해서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겠다”며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당초 이 외무상이 직접 전세계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ARF 회의에서 발언을 마친 뒤 숙소인 마닐라 뉴월드 호텔로 돌아온 이 외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취재진을 지나쳐 갔다. 대신 그를 수행한 방광혁 북한 외무성 국제기구국 부국장이 이 외무상의 연설문을 배포했다. 그는 이번 북한 대표단의 대변인을 맡고 있다.

지난해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ARF에서는 이 외무상이 직접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약 10분에 걸쳐 취재진의 질문도 받았다. 어떤 어려운 질문에도 막힘 없이 대답하는 숙련된 외교관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올해는 두 차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 등으로 인해 한층 고립된 상황을 의식한 듯 언론 취재에는 전혀 응하지 않은 채 로키 행보를 이어갔다.

방 부국장은 연설문을 나눠주기에 앞서 “이용호 외무상이 연설에서 조선의 핵 보유가 미국이 떠드는 것처럼 세계적 위협이 되는가, 아니면 미국에 한해서만 위협이 되는가에 대한 입장을 이야기했다”며 “조선반도 핵무기의 근원과 조선반도 정세 격화의 근원이 미국에 있다는 입장을 이야기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할 말만 하고서는 자리를 떴다.

지난해에는 회의 앞머리에 발언한 뒤 대부분 회원국 외교장관들의 발언을 듣고 비공개 토론의 거의 마지막에 나왔지만, 이번엔 회의 중간에 연설한 뒤 바로 회의장을 나온 점도 달랐다. 외교가 소식통은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란 점을 인식해 지난해와 다른 모습을 보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마닐라=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