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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숨어있던 승리, 영화 '덩케르크'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위기의 순간

2차세계대전이 발발한지 열흘이 지난 1940년 5월 20일, 독일 제2기갑사단이 솜 강 하구에 위치한 아브빌(Abbeville)을 점령하였다. 아직은 독일군이 개척한 통로가 그다지 공고하지 못하였지만, 이는 플랑드르와 북부 프랑스의 저지대에 몰려 있던 연합군 주력의 배후가 차단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연합군은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고 결국 한달 후에 프랑스는 항복하게 되지만 그때는 그런 비참한 미래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당황한 연합군 일부가 솜 강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제2기갑사단의 뒤를 이어 수많은 후속 부대들이 도착하면서 강화한 독일군의 포위망을 넘기 힘들었다. 독일군은 프랑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르덴(Ardennes) 고지대를 통과하여 대서양을 향해 신속하게 진격한 뒤, 아브빌 점령에 이어 공격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포위망을 압축하여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아브빌 점령 직후 전선의 모습. 연합군은 포위망을 돌파하려 애썼으나 실패로 끝나고 덩케르크 일대로 밀려 들어갔다. [사진 미 육군 사관학교 홈페이지 캡처]

아브빌 점령 직후 전선의 모습. 연합군은 포위망을 돌파하려 애썼으나 실패로 끝나고 덩케르크 일대로 밀려 들어갔다. [사진 미 육군 사관학교 홈페이지 캡처]

그렇게 프랑스 북부의 덩케르크(Dunkirk) 해안가로 밀려난 연합군은 5월 26일이 되자 30여만 명의 영국 원정군(BEF)을 포함하여 40여만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중장비를 버리고 도망쳐 온 패잔병들이었지만 영국은 이들이 몰살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렇게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로 명명된 역사에 길이 남는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워낙 급박하였기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자신이 서지 않았다. 독일 육군이 사방을 엄중히 둘러싸고 있고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독일 공군이 하늘을 차단한 상태에서 구출 작전이 어려울 것은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후일 처칠이 회고록에서 “5만 명 정도나 구출해내면 다행”이라고 했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그런 우려대로 탈출 중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일부는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내다가 포로가 되었다.

모두의 힘으로 이룬 기적

최근 개봉된 “덩케르크”는 그런 긴박했던 순간을 그린 영화다. 염전 사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살아남기 위한 병사들의 몸부림을 너무나 자세하게 묘사하여 전반적으로 암울한 모습이다. 그러나 전쟁사적으로 다이나모 철수 작전은 독일이 두고두고 통탄해 한 반면, 영국에게는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되어 준 숨어있는 승리였다. 사실 일방적으로 이긴 전투라도 말단 병사가 마음이 편한 경우는 결코 한 번도 없다.

영화 덩케르크의 스틸 컷. 살아남기 위한 병사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덩케르크의 스틸 컷. 살아남기 위한 병사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6월 4일, 작전이 종료되었을 때 무려 338,226명이 안전하게 영국 땅을 밟았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이런 놀라운 결과가 나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이 바다를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독일 공군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영국 공군의 놀라운 분투와 징발 혹은 자원하여 참여한 어선 같은 수많은 민간의 작은 배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80퍼센트 이상의 병력이 부두에서 42척의 구축함을 비롯한 대형 선박에 올라 탈출하였으나 해안가에서 목이 빠지게 대기하던 나머지 병력 대부분을 구출한 것은 이후 덩케르크의 작은 배들(Little Ships of Dunkirk)로 불리게 되는 이들 선박이었다. 물론 배에 탔다고 안전하였던 것은 아니었고 독일의 집요한 공격에 243척이 격침되었다. 이렇게 구출해낸 병력은 이후 영국 본토 방어에 투입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 되었다.

해안가에서 선박에 오르는 실제 모습. 이때 영국으로 안전하게 탈출한 33만의 병력은 나치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사진 위키페디아]

해안가에서 선박에 오르는 실제 모습. 이때 영국으로 안전하게 탈출한 33만의 병력은 나치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사진 위키페디아]

1943년 2월,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포위망 안에 갇혀 산화하거나 포로가 된 독일군이 약 33만 명이었다. 그 이전에 더 많은 희생과 소모가 있어서 직접 비교는 곤란하지만 전 유럽을 석권했던 독일이 이 패배를 기점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덩케르크 철수가 내포한 의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영국에게 전쟁의 승자가 되도록 만든 커다란 면역 주사였다. 병사들을 해안에서 태워 영국으로 구출해간 작은 어선들은 영국민들의 강한 애국심의 발로였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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