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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하이닉스 주변엔 6000억원의 초호황 낙수가 흐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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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의 산업 지도 

대기업이 잘되면 중소기업과 가계로 온기가 퍼지는 낙수(trickle-down)효과는 정말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에 나오는 고도(godot)처럼 아무리 기다려도 결국 오지 않는 존재일까. SK하이닉스의 사례는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기업 실적이 좋아지면서 고용이 늘고 주변 상권이 뜨고 지자체 지갑까지 두둑해졌다. SK하이닉스의 과거, 현재, 미래를 현장에서 짚어 봤다.

고용 늘고 이천시 상권도 호황 #이천시 “어머니 젖줄 같은 기업” #‘고난의 행군’ 이겨낸 직원 큰 역할 #시장원리 지키지 않아 성공한 사례 #중국 추격에 호황 언제까지 갈까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 2017년 7월 현재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축구장 7.5개 면적에 해당하는 5만3000㎡(1만6000평) 규모의 최첨단 생산라인인 M14의 불은 밤에도 꺼지지 않았다. [이천=김상선 기자]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축구장 7.5개 면적에 해당하는 5만3000㎡(1만6000평) 규모의 최첨단 생산라인인 M14의 불은 밤에도 꺼지지 않았다. [이천=김상선 기자]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의 밤은 낮과 별 차이 없었다. 2015년 가동을 시작한 최첨단 반도체 생산라인인 M14가 훤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라인은 4조 3교대로 연중무휴 24시간 팽팽 돌아갔다. 오전 7시, 오후 3시, 오후 11시, 생산직 교대조가 바뀔 때마다 ‘행복문’으로 불리는 이천캠퍼스 정문 주변이 붐볐다.

24일 오후 6시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하이닉스 앞 상가엔 하이닉스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남돼지집 신성순 사장은 이른 저녁인데도 숯불을 피우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손님에 온통 신경이 팔려 있는 그가 겨우 몇 마디 했다. “이곳 상권은 하이닉스가 절대적이죠.”

상가 주변엔 오피스텔과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하이닉스가 SK그룹에 편입된 2012년 이후 국내 고용이 2653명 늘었다. 정현재 SK하이닉스 PR팀 책임은 “몇 년 전만 해도 주변이 논밭이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가 여기저기 들어섰다”고 했다.

요즘 SK하이닉스 분위기는 정말 좋다. 2분기 매출은 7조원에 육박하고 영업이익은 사상 처음으로 3조원을 넘어섰다. 영업이익률이 역대 최고 수준인 46%, 반도체 팔아 절반을 이윤으로 남겼다. 시장에서는 연간 영업이익이 15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2012년 SK그룹이 하이닉스를 인수한 뒤 시설투자를 전년 대비 10% 늘린 공격적 투자 덕이었다. 당시는 반도체 업황이 나빠 전 세계 반도체 회사들은 시설 투자를 줄이던 때였다.

실적이 좋아지면서 회사 설립 이후 1995년 법인세를 한 차례만 냈던 하이닉스가 19년 만인 2014년 두 번째 법인세를 냈다. 2014년부터 3년간 SK하이닉스가 낸 법인세는 2조3000억원에 달했다. 이천에도 같은 기간 1580억원의 지방법인세가 쏟아졌다. 유문선 이천시 지역개발국장은 “하이닉스는 이천의 어머니 젖줄 같은 기업”이라 고 했다. 이천상공회의소는 SK하이닉스 덕분에 지난해 지역 내에 풀린 돈이 지방 세수와 공사·자재 발주액을 합쳐 3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천상의는 이천에 거주하는 직원과 가족, 건설인력, 입주사 직원 등으로 인한 지역소비 추정액 3000억원을 포함하면 하이닉스로 인한 지난해 낙수효과는 6000억원 이상 될 것으로 추산했다.

# 빅딜과 2001~2005년 ‘고난의 행군’

SK하이닉스의 전신은 1983년 설립된 현대전자다. 현대그룹 계열사였지만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하이닉스 이천공장 바로 옆에 한때 계열사였던 현대엘리베이터 공장이 있다는 점과 하이닉스의 사명에서 현대그룹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하이닉스(Hynix)라는 이름은 현대전자의 영어 이름인 Hyundai Electronix(nics)에서 따왔다.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현대전자는 99년 김대중 정부가 밀어붙였던 재벌그룹 간 대규모 사업 교환(빅딜)에 따라 LG반도체를 인수했다.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라는 메시지를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에게 전해 들으며,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통음(痛飮·술을 많이 마심)했다.

LG반도체와의 합병은 거대 부채 기업을 탄생시켰다. 99년 10월 합병 당시 부채는 17조원, 차입금 12조7000억원이었다. D램 가격 하락으로 결국 2000년 말 유동성 위기가 터졌다. 2001년 하이닉스반도체로 이름을 바꾸고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왔다. 하이닉스는 채권은행의 골칫거리이자 금융시장의 핵폭탄이었다. 채권단 주도의 하이닉스 지원방안이 연일 신문을 장식했다. 반도체는 설비 투자가 중요한데 돈이 없었다. 하이닉스는 미국 마이크론에 헐값으로 팔릴 위기에 몰렸다.

하이닉스를 살린 건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자존심과 혼을 담보로 맡기겠다”며 구조조정에 동참했다. 임금을 동결하고 감원을 받아들였다. 설비투자를 할 돈이 없어 200㎜ 웨이퍼 공장을 300㎜ 공장으로 리모델링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한때 20여 개에 달했던 D램업체 중 3~4개만 생존하는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았다.

‘모피아’로 불렸던 금융 관료들도 한몫했다. 당시엔 시장 원리에 따른 구조조정을 주장하며 하이닉스를 처리해야 한다는 학자가 많았다. 하지만 금융 당국은 채권단을 틀어쥐고 하이닉스 등 옛 현대 계열사들의 산소호흡기를 떼지 않았다. ‘회사채 신속인수’라는 창조적인(?) 제도까지 고안해 시장에서 소화하기 힘든 이들 회사의 회사채를 사줬다. 어찌 보면 하이닉스는 시장 원리를 지키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한 사례다.

# 위기에서 무엇을 배웠나

현대그룹 시절과 채권단 관리 시기, SK그룹의 품에 안긴 요즘을 직원들은 각각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대그룹 시절은 디테일한 관리보다는 방향을 주고 도전하게 하는 분위기가 강했어요. 반면 모든 게 통제였던 채권단 관리 시기에는 외려 직원들이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됐죠. 채권단만 믿지 말고 우리끼리 한번 잘해 보자는 열기가 있었지요. SK그룹의 일원이 된 다음에는 경영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어요. 노후하고 열악한 환경도 크게 좋아졌고요. 옛날에는 이곳이 그저 ‘공장’이었는데 지금은 ‘회사’ 같대요.” 이천캠퍼스 총무팀 프로젝트 리더인 최계철 수석의 말이다.

최 수석은 “ 호황이라고 안심 못한다”며 “경영진도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강조한다”고도 했다. 지금은 반도체 가 초호황이 이어지는 수퍼사이클을 타고 있지만 몇 년 안에 공급과잉이 다시 문제가 될 수 있다. ‘반도체 굴기’를 표방하며 대규모 증설에 나선 중국이 무섭게 추격하고 있어서다. 중국의 ‘반도체 자급’에 가속도가 붙으면 2년 뒤엔 공급과잉이 우려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최 수석은 현대전자 시절인 92년 입사해 빅딜과 은행 관리 시절을 겪었다. “우리는 이를테면 ‘6·25’를 겪은 세대지요. ‘전후세대’와 느낌이 다를 수밖에요. 얼마 지나서 다운턴이 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잊지 않으려 해요. 불황 때는 호황을 생각하고 호황 땐 불황에 대비해야죠.”

구호처럼 들리는 그의 마지막 말에 로마의 군사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유명한 어록을 떠올렸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