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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길에 20km 돌아 출근하다 사고 워킹맘…'통상적 출근' 인정된 8가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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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자료 사진.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중앙포토]

어린이집 자료 사진.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중앙포토]

직장과 반대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친정집 근처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맡기고 출근하던 도중에 난 사고라 하더라도 이를 ‘통상적 출근길’ 사고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친정에 아이 맡기고 출근하다 사고 #법원 "아이 맡기는 일은 출퇴근에 필수 #다양한 자녀 양육방식 중 하나 택한 것"

지방의 교육공무원으로 일하는 ‘워킹맘’ 조모(40)씨가 ‘친정집’도 ‘집 근처 어린이집’도 아닌 ‘친정집 근처 어린이집’에 두 아들을 맡기게 된 사연은 이렇다. 맞벌이를 하고 있는 조씨 부부는 아이들이 막 태어났을 무렵에는 아예 아이들을 친정 어머니 집에 맡겼다. 그런데 아이들이 조금 크고 난 후 어머니가 다른 손자들을 볼봐줘야 하는 사정이 생겨 하는 수 없이 어머니 집 근처의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조씨는 2년 넘게 자동차로 집→친정→회사→친정→집을 오가는 출퇴근을 계속해왔다.

가을비가 내리던 지난해 9월, 조씨는 평소처럼 친정집 근처 어린이집에 두 아들을 맡기고 방향을 돌려 직장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출근 시간을 20분 앞뒀을 무렵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며 중앙선을 넘었다. 반대방향에서 오던 차와 부딪힌 충격으로 조씨는 골반뼈 골절과 간 손상 등을 입었다.

조씨는 출근길에 다친 것이니 당연히 공무상 요양으로 인정돼 진료비와 치료비 등을 지급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공무원연금공단으로부터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정상적인 출근 경로를 벗어나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출근 중의 사고라 볼 수 없다”며 조씨의 요양 승인 신청을 거절했다. 공단은 조씨의 집에서 직장까지는 1km정도로 차로 3분이면 갈 수 있는데 굳이 직장과 반대 방향으로 왕복 20km나 떨어진 어린이집에 들른 것을 문제삼았다. 이에 조씨는 “수 년째 아이들을 친정에 데려다주고 출근해 왔는데 이를 출근길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며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서울행정법원은 행정6단독 심홍걸 판사는 “공무원연금공단은 조씨에게 공무상 요양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최근 판결했다. 심 판사는 왜 조씨의 출근길이 통상적 출근길인지에 대해 8가지 이유를 들었다.

심 판사는 “조씨 부부는 공무원 부부로 모두 일정 시각까지 각자 직장에 출근할 의무가 있다”면서 “영유아인 두 아들을 보호해줄 사람이나 기관이 없으면 출퇴근해 일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이들을 보호해줄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출퇴근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행위다”고 판단했다. 또 “조씨 부부의 직장에는 모두 어린이집이 없고 시부모는 건강이 좋지 않아 아이들을 돌봐줄 형편이 되지 않았으며 친정 어머니가 손자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데리고 살며 키워온 상황에서 출근길에 집과 다소 거리가 있는 친정에 아들들을 맡기고 출근한 것은 보통의 맞벌이 직장인들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양육방식이다”고 보았다.

이어 “집과 직장 사이에 있는 어린이집에 아들들을 맡기거나 돌보미를 고용해 자신의 집에서 돌보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자녀 양육방식은 다양해서 그 중 최고 내지 최선의 선택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면서 “조씨와 같은 양육방식은 조부모가 손자들을 돌봐줄 수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외에도 심 판사는 왕복거리 20km정도는 직장인이 충분히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라는 것, 조씨보다  먼 곳에서 출근하는 공무원이 출근길에 있는 어린이집에 자녀를 맡기고 출근하다 사고를 당한 경우는 통상적 출근으로 인정될 것이므로 형평에 어긋난다는 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모성 보호와 남녀고용평등을 실현하고 근로자의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보호자인 친정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출근하다 발생한 사고는 통상적 경로로 출근하던 중 발생한 사고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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