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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82세에 소설가 꿈 이룬 ‘복싱 해설 대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36년간 복싱 해설을 해오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품었던 소설가 꿈을 이뤄 너무 즐겁습니다.”

문예지에 단편 당선된 한보영씨 #1980년부터 37년간 복싱 해설 #권투 선수의 실화 작품에 담아 #“29년간 기자로 일한 게 큰 도움 #글쓰기는 치매 예방에 도움 돼”

‘복싱 해설의 대부’로 불리는 전 MBC 복싱 해설위원(객원·계약직) 한보영(82·경기도 양주시)씨의 말이다. 그는 올해 초 월간문예지 ‘조선문학’이 실시한 ‘신인작가 공모전’에 낸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이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이어 이달 초에는 월간문예지 ‘문학세계’에 단편소설 ‘부나비의 꿈’을 발표했다.

“복싱 해설가로서의 인생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던 저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는 1980년부터 2007년까지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국 프로복싱 중흥기였던 1980~90년대에 복싱 해설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요즘도 간혹 복싱 경기장에 나가 방송중계 해설을 하고 있다.

82세에 소설가로 등단한 ‘복싱 해설의 대부’ 전 MBC 복싱 해설위원 한보영씨. [전익진 기자]

82세에 소설가로 등단한 ‘복싱 해설의 대부’ 전 MBC 복싱 해설위원 한보영씨. [전익진 기자]

2007년 MBC 복싱 해설위원을 그만둔 후 특별한 일이 없이 지내던 그는 지난해 봄 ‘글쓰기는 치매 예방과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뇌 전문의의 글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신인 작가 공모에 응모한 첫 작품이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지만, 소설가로의 변신이 쉽지만은 않았다.

지난해 4월 소설 집필에 나선 뒤 원고지 80매 분량의 소설을 구상하고 세상에 선보이기까지 1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복싱해설과 함께 63년부터 92년까지 29년간 일간지와 잡지 기자로 일한 경험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고 했다.

"기사와 소설 쓰기는 비슷한 점도 많지만, 확연히 다른 면이 있어 처음엔 고충이 컸습니다. 기사는 육하원칙에 따라 사실을 적는 것인데 반해,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하는 것이죠.”

그가 단 한 차례의 노크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출신인 그는 대학시절 당대 최고의 문학가인 고 김동리, 고 서정주 선생으로부터 문학과 글쓰기를 배웠다. 16세 때부터 60여 년간 이어오고 있는 일기 쓰기 습관도 글쓰기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소개했다. 문창과 출신인 그가 복싱 해설가로 나선 것은 스포츠 기자를 하던 중 복싱에 매료된 데다 특유의 말솜씨와 해설 능력을 인정받은 게 출발점이 됐다.

소설가 등단 작품의 소재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사랑 이야기다. 자신의 얘기를 바탕으로 썼다. 이달 초 소설가가 된 후 선보인 첫 작품은 복싱선수 이야기다. 과거 이국의 링에서 세계 타이틀전에 도전했다가 KO패를 당한 뒤 숨을 거둔 한 프로권투 선수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이야기를 썼다. 이 소설을 통해 극한의 고통 속에 목숨을 걸다시피하고 링에 오르는 권투선수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가를 전했다.

"올해까지는 단편소설로 내공을 다진 뒤 내년부터는 장편소설 집필에 나설 계획입니다.” 그는 "63년 기자 생활을 시작한 뒤 50년 넘게 글을 쓰고 있지만 글쓰는 일은 재미있으면서도 힘든 일”이라고 했다.

80대이지만 노트북 자판을 능숙하게 두드려 글을 쓰는 그는 나이를 고려해 하루 1시간 이상은 집필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글쓰기가 그만큼 집중력과 체력이 필요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뒤늦게 소설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대중과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양주=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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