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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유네스코 문화전쟁선 이스라엘에 압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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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7일 유네스코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열린 회의에서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헤브론 구시가지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헤브론은 훼손 위기에 처한 세계문화유산에도 이름을 올렸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투표 결과(찬성 12개국, 반대 3개국, 기권 6개국)에 따라서다.

기독·유대·이슬람교 공동의 성지 #헤브론을 이슬람 유산으로 등재 #네타냐후 “유네스코 망상적” 비난 #유네스코 가입 묘수 둔 팔레스타인 #예수 탄생지 등 3곳 문화유산 등재

결과 발표 뒤 회의장은 난장판이 됐다. 카멜 샤마 하코헨 주유네스코 이스라엘 대사는 위원장 책상으로 달려 나가 고함을 지르고는 퇴장했다.
“파리에 있는 내 아파트 배관공에게 전화가 왔는데 화장실에 문제가 있단다. 당신들의 결정 따위는 화장실보다 중요하지 않다.”
이스라엘 대사가 외교 결례를 무릅쓰고 항의할 만큼 이번 결정은 이스라엘에 뼈아픈 패배다. 반면 팔레스타인 외무장관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외교 전쟁에서 이겼다”며 결정을 환영했다.

지난 7일 유네스코가 팔레스타인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헤브론 구시가지 전경.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파트리아크 동굴(이브라힘 모스크)이다. [UP=연합뉴스]

지난 7일 유네스코가 팔레스타인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헤브론 구시가지 전경.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파트리아크 동굴(이브라힘 모스크)이다. [UP=연합뉴스]

아브라함이 묻힌 곳, 파트리아크 동굴
대립하고는 있지만 신생국 팔레스타인은 미국을 업은 이스라엘과의 힘 대결에서 적수가 안 된다. 자치 영토를 잠식당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때문에 유엔 정회원 가입도 요원하다. 그러나 유네스코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대등하게 맞붙을 뿐 아니라 최근 대결에선 팔레스타인이 백전백승하는 모양새다. 헤브론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그 정점이다.

헤브론은 이스라엘이 집중적으로 정착촌을 건설한 서안 지구의 최대 도시다. 팔레스타인은 정식 독립국가로 인정받을 때 이 지역이 영토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스라엘은 협상을 통해 관할권이 결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양측이 양보할 수 없는 서안 지구에서도 헤브론은 핵심이다.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모두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성경·토라·쿠란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아랍명 이브라힘)의 무덤이라고 가리키는 파트리아크 동굴이 이곳에 있다.

유대인들은 이곳에 아브라함·이삭·야고보와 그들의 아내 사라·레베카·레아가 묻혀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곳을 ‘이중 무덤의 동굴’을 뜻하는 ‘마크펠라 동굴’이라고 부른다. 동예루살렘에 있는 템플마운트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성지다.
무슬림에게도 경배의 장소다. 이들은 동굴 위에 사원을 짓고 ‘이브라힘 모스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메디나, 예루살렘의 하람 알샤리프(템플마운트의 아랍명)를 잇는 네 번째 이슬람 성지다.

공통의 성소(聖所)임에도 유네스코는 이곳을 팔레스타인만의 유산으로 등재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결의안은 건축물이 14세기 이브라힘 모스크로 지어졌다는 사실만 적시했다”고 전했다. 팔레스타인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이스라엘은 역사 왜곡이라고 격분하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유네스코의 망상적 결정”이라며 “누가 거기 묻혀 있나. 우리 선조들이다. 그런데 유대인 유산이 아니란 말이냐”고 비난했다.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의 공동 성지인 파트리아크 동굴(이브라힘 모스크). [AFP=연합뉴스]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의 공동 성지인 파트리아크 동굴(이브라힘 모스크). [AFP=연합뉴스]

"유네스코 결정은 팔레스타인에 득점 포인트" 
이스라엘의 분노는 종교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유네스코의 결정은 향후 외교정치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피 호토벨리 이스라엘 외교차관은 “유대인의 국가 상징을 도용하는 결의안이 다수 아랍국가의 무조건적 지지로 통과됐다”고 비판했다. 순수한 역사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목적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AP통신도 “유엔과 산하기관에서 아랍국가와 그 지지 국가들이 이스라엘-미국 동맹을 수적으로 압도하고 있다”며 “이번 결정은 유엔에 스며든 반(反)이스라엘 정서를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예루살렘정책연구소의 이차크 라이터는 AP통신에 “서안 지구의 운명을 가를 협상에서 팔레스타인에 득점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갈등은 팔레스타인이 유네스코에 가입할 때부터 예고돼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유엔에 정회원 가입 요청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2011년 9월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게 요청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건 팔레스타인도 아는 뻔한 사실이었다. 미국이 있는 한 “5개 상임이사국 중 거부권 행사 국가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집중된 여론을 유네스코 가입에 활용했다. 가입 조건에 거부권 규정이 없는 유네스코를 통해 국제사회 진출 물꼬를 트는 전략이다. 수년째 계류 중이던 유네스코 가입안이 이즈음 급물살을 탔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분담금을 볼모로 반대했지만 대세는 팔레스타인 편이었다. 10월 193개 회원국 중 173개국이 참여한 표결에서 찬성 107 대 반대 14로 팔레스타인은 195번째 회원국이 됐다.
유네스코 가입은 팔레스타인에 ‘신의 한 수’가 됐다. ‘약소국’ 처지가 강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 이 부분이다.

2014년 팔레스타인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티르 문화경관. [유네스코 웹사이트]

2014년 팔레스타인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티르 문화경관. [유네스코 웹사이트]

베들레헴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예수탄생지:예수탄생 교회와 순례길'. [유네스코 웹사이트]

베들레헴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예수탄생지:예수탄생 교회와 순례길'. [유네스코 웹사이트]

헤브론을 포함해 팔레스타인의 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3곳이다. 2012년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지: 예수 탄생 교회와 순례길’이, 2014년엔 남예루살렘의 올리브·포도 산지인 ‘바티르 문화경관’이 이름을 올렸다.

팔레스타인은 등재를 요청하면서 매번 ‘패스트 트랙’ 제도를 이용했다. 심사가 까다롭고 시간이 걸리는 일반 등재와 다른 비상 절차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탓에 유산이 위기에 처했다는 논리로 제도를 활용했다. 약자임을 내세워 이스라엘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땅의 주인은 팔레스타인이라는 결정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유적은 왜 늘 위기에 처해 있느냐”고 항변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선정 기준에도 의문을 품는다. ‘바티르 자연경관’이 예다. 이스라엘은 “바티르가 수많은 마을과 비교해 뭐가 특별한지 모르겠다”며 “이스라엘의 장벽 건설을 막기 위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유네스코는 “수세기 동안 경작한 농경지에서 마을 주민을 고립시킬 수 있는 분리 장벽 건설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의 점령이 영향을 미쳤다는 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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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 결정은 더 있다. 지난해 10월엔 유대교·이슬람교 공동 성지인 템플마운트 관리에 대한 '점령된 팔레스타인' 결의안이 통과됐다. 동예루살렘 내 팔레스타인 유적지에 대한 팔레스타인인 접근을 막는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힘의 논리 안 통하는 유네스코…대처법 없는 이스라엘
불리한 결정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스라엘에 뾰족한 수가 없다. 지원 중단과 교류 축소를 반복할 뿐이다. 헤브론 등재 후에 이스라엘은 유네스코에 대한 100만 달러(약 11억3000만원) 지원을 철회했다.
그러나 유네스코는 달라지지 않았다. 교육·과학·문화기구인 유네스코에 대한 거센 저항은 역풍을 불러올 뿐이었다. 팔레스타인 가입에 반발해 유네스코 재정 22%를 담당하던 미국이 지원을 중단했을 때도 “미국의 영향력이 줄고 반이스라엘 정서가 강해지는 역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관계의 법칙을 유네스코가 비켜가는 셈이다. 힘으로 팔레스타인을 압도해 온 이스라엘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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