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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길에서 희망을 본 '마크로마니아' 앙마르슈를 최대 정당으로 만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낡은 정치 청산’과 ‘개혁’을 앞세워 또 한번의 선거 혁명을 이뤄냈다.
11일(현지시간) 프랑스 총선 1차 투표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레퓌블리크 앙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ㆍ민주운동당(MoDem) 연합의 32.32% 득표는 프랑스의 정치 시스템을 전면 교체하기에 충분하다. 표심이 18일 결선투표에서도 그대로 유지될 경우 앙마르슈는 하원  577석의 77%에 달하는 최대 445석을 석권하게 된다. 1968년 샤를 드골 당시 대통령의 승리(73%)를 능가하는 프랑스 선거 사상 최대 승리다. 일각에선 마크롱 대통령이 ‘국민영웅’으로 대접받은 드골 이후 최고의 국정 장악력을 쥐게 됐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창당한지 1년을 갓 넘긴 신생정당 앙마르슈의 압승엔 39세란 젊음을 앞세운 마크롱 대통령의 개인기가 크게 작용했다. 마크롱은 당선 직후 내각의 절반에 여성을 기용하고, 알랭 쥐페 전 총리의 최측근인 에두아르 필리프를 총리로 지명하는 등 이념과 진영을 뛰어넘는 인재 등용으로 마니아층을 만들어냈다. 특히 취임 다음날 곧바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나 유로존 개혁 약속을 이끌어낸 것을 비롯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주요 7개국(G7) 정상외교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프랑스인들이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해던 자존심을 한껏 세워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깜짝 놀라게 한 강렬한 악수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면전에서의 선거개입 의혹 제기 등 ‘스트롱맨 조련사’로서의 모습은 ‘위대한 프랑스’를 갈망해온 프랑스인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1차 투표 개표 결과 마크롱의 앙마르슈 32.32% 득표해 압승 전망 #"마크롱은 나의 마지막 희망. 그가 실패하면 앞으로 투표 안하겠다" #기성 정치권 무능에 실망한 국민들, 마크롱에 기대감 #노동 시장 유연화, 공공부문 일자리 감축 등 과감한 개혁 약속에 호응

프랑스 총선을 하루 앞둔 10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북부 해안도시 르 투케를 방문해 지지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프랑스 총선을 하루 앞둔 10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북부 해안도시 르 투케를 방문해 지지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유권자들의 심판은 확실히 무서웠다. 2차 대전후 프랑스 정치를 양분해온 공화당과 사회당은 참패했다. 중도우파 공화당 계열은 지난 의회 의석 215석에서 절반가량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직전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은 전멸하다시피했다. 사회당 계열은 315석에서 10분의 1 수준(20~40석)으로 쪼그라들 것이 유력시된다. 단 한번의 선거로 기존 정치판이 이렇게 물갈이되는 것은 유사 사례를 찾기 힘들다.
프랑스 파리 북부에 거주하는 자니 포셰(67)가 이런 유권자들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30여년 이상 사회당에 표를 던져왔지만, 이번에 그가 찍은 인물은 마크롱이 디지털경제장관에 임명한 기업가 출신 무니르 마주비다. 정치 경력은 전무하다. 포셰는 “만약 마크롱이 실패하면 앞으로 절대 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 마크롱이 나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파이낸셜 타임스에 말했다.

프랑스 총선 1차 투표가 실시된 11일 르 투케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오른쪽)과 그의 부인 브리지트 트로노가 나란히 기표소를 나서고 있다. [르 투케 AP=연합뉴스]

프랑스 총선 1차 투표가 실시된 11일 르 투케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오른쪽)과 그의 부인 브리지트 트로노가 나란히 기표소를 나서고 있다. [르 투케 AP=연합뉴스]

심판의 배경이 된 것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존 정치 권력들의 무능이었다. 프랑스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는 동안 개혁에 실패하면서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 이웃나라 독일의 실업률이 4%인데 비해 프랑스는 10%를 넘나들었다. 25%에 육박하는 청년층 실업률은 곧 프랑스 미래의 좌절을 의미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에서 경제성장률은 겨우 1%대에 머물렀다.

마크롱은 새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갈망을 읽어냈다. 그리곤 기존 정치판에선 상상할 수 없는 대대적인 새 인물 공천이라는 승부수로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또 노동개혁과 공공부문 개혁을 통해 침체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겠다고 약속했다.
마크롱이 내건 노동 개혁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다. 여기엔 1998년 사회당 정부 시절 일자리를 늘린다는 명분으로 도입된 ‘주35시간 노동제’의 수술이 포함된다.
마크롱은 주35시간 뼈대는 유지하되 초과 노동이 개별 기업간 노사 협상으로 가능하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자신이 올랑드 정부 경제장관 시절 시도했다 실패한 개혁안을 이번엔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또 현행 33%인 법인세율을 유럽연합(EU) 평균인 25%로 대폭 낮추는 등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도 예고하고 있다.
공공 부문 개혁도 드라이브를 건다. 마크롱 정부는 퇴직자로 인해 발생하는 결원을 충당하지 않는 식으로 공공부문 일자리를 12만 개 줄일 계획이다. 이 같은 구조조정을 통해 5년 동안 정부 지출을 600억 유로(약 75조원) 절감할 방침이다.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38%로 유로존 평균(15%)의 두 배가 넘어 수술이 시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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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쇼트레 시앙스포 교수는 앙마르슈의 압승에 대해 “유권자들이 마크롱에게 기꺼이 기회를 주고 싶어했다”고 분석했다.
그의 말처럼 마크롱으로선 의회 권력까지 장악,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탄탄 대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진검 승부는 이제부터라는 시각도 있다. 마크롱이 전면에 내세운 노동과 공공부문 개혁엔 노조와 공무원들의 강력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공화당 프랑수아 바루앵 총선대책본부장은 “한 정당에 권력이 집중돼서는 안 된다”며 공화당 지지자들의 결선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캉바델리 사회당 서기장 역시 “의회에서 민주적 토론이 이뤄질 여지가 없어질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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