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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가야사 언급 이후, 김해 봉황동 유적발굴 현장 가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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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5일 김해 금관가야 왕궁 추정지에서 국립가야문화재 연구소 직원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5일 김해 금관가야 왕궁 추정지에서 국립가야문화재 연구소 직원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5일 경남 김해시 봉황동 유적 발굴지(5000㎡). 3~4세기경 큰 영향력을 떨쳤던 금관가야 왕궁 추정지의 일부다. 인근에 김수로 왕릉과 대성동 고분군·구지봉 등이 있다.

고위층 사용 유리장식품 등 발견 #영향력 컸던 금관가야 왕궁 추정 #문 대통령 가야사 강조 후 복원 탄력 #2020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평상복에 모자를 쓴 10여 명의 발굴 전문가들이 조그마한 삽과 붓을 들고 2~3m 깊이로 파 놓은 땅속에서 주변 흙들을 조금씩 벗겨냈다. 집·우물 터 등이 있던 자리에는 흰색 선을 그어놓았다. 다른 작업자는 유적의 모양과 크기를 자로 재서 작은 그림으로 그렸다.

발굴을 맡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민경선 학예연구사는 “1세기 전후 진한(경북 일대)·변한(경남 일대)·마한(호남 일대)을 중심으로 한 초기 삼한 시대를 지나 3~4세기경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가 가장 영향력이 컸는데, 이곳이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추정돼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굴은 2015년 9월 시작됐고, 내년 말까지 계속된다. 현재까지 곡식을 담거나 찌는 항아리와 시루 같은 생활 토기, 철을 제련할 때 공기 통로로 쓴 ‘송풍관’, 받침대가 있는 굽다리 접시, 토우, 사슴·고래 뼈 등 5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이곳이 오랫동안 취락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그렇다고 왕궁터였다는 기록이나 이를 뒷받침할 유물이 나온 건 아니다. 하지만 가야 고위층 등이 사용한 유리장식품 등이 나와 왕궁터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지시하면서 가야사 복원 사업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경남은 가야사 관련 국가 사적 28곳 중 22곳이 있는 가야국의 주 무대. 특히 김해는 금관가야의 수도여서 그동안 다양한 복원 작업이 진행됐었다.

삼한시대를 지나 고구려·백제·신라가 중심이 된 삼국시대에도 한반도에 가야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여럿 있었다. 금관가야 외에 대가야(경북 고령), 아라가야(경남 함안), 소가야(경남 고성), 비화가야(경남 창녕), 성산가야(경북 성주) 등이다. 이 가운데 대가야는 5~6세기경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가야에 이어 금관가야(532년)와 대가야(562년) 마저 신라에 병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70년대부터 가야지역에서 대형 고분이 수십 혹은 수백개씩 발견되면서 가야사 복원 사업은 시작됐다. 그러나 가야인의 삶을 직접 볼 수 있는 생활터전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왕궁터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가야 왕궁터가 확인된 곳은 없다.

이런 가운데 경남·경북도와 경남 김해시·함안군, 경북 고령군 등 5개 자치단체는 지난 2월 ‘가야 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단’을 발족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341호), 함안 말이산 고분군(사적 515호),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79호) 등 3곳이 등재대상이다.

추진단은 내년까지 등재신청 준비를 마친 뒤 문화재청을 거쳐 202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릴 계획이다. 가야 역사를 살리고 보전해 국제적 지명도를 높이고 가야문화를 새 관광자원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김해시도 2000~2004년 1290억원으로 추진됐던 대성동 고분군 등 가야사 1단계 복원 사업에 이어 노무현 정부때 예산 부족으로 착공하지 못했던 2단계 사업(가야문화관·가야체험관·가야문화공원)과 가야 왕궁 복원사업을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

김해시도 2000~2004년 1290억원으로 추진됐던 대성동 고분군 등 가야사 1단계 복원 사업에 이어 노무현 정부때 예산 부족으로 착공하지 못했던 2단계 사업(가야문화관·가야체험관·가야문화공원)과 가야 왕궁 복원사업을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

창원대 남재우(사학과) 교수는 “가야는 삼국시대 신라·백제와 비슷한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었으나 그동안 연구가 미진했다”며 “고분과 함께 생활터전이 됐던 왕궁과 성곽 등을 발굴조사 해야 체계적인 가야사 연구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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