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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국제체제는 복합시스템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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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주 미국과 캐나다 동부지역을 휩쓴 정전사태가 다행히 빠른 속도로 정상 복구되고 있다. 이번 사태로 5천만명 이상의 주민이 고통을 받았고 경제피해 규모도 수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같은 대형 정전사고는 전에도 수차례 있었다. 1965년 11월 미국 동북부지역 3천만명의 주민이 피해를 본 정전사고와 96년 8월 미국 서부 전 지역에서 전기로 작동되는 모든 것을 9시간이나 멈추게 한 사고가 대표적인 예다.

이번 사고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조사 중에 있다. 그러나 과거의 경우로 미루어 볼 때, 이처럼 짧은 시간에 광대한 지역이 영향을 받은 대형 사고는 복합시스템(Complex System)의 특성에 기인한다.

*** 연쇄적으로 파급된 美정전사태

복합시스템은 이를 구성하는 개체의 수가 많을 뿐 아니라 상호간 밀접한 연계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기본적인 기능을 유지하며 생존하는 견고함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주 미세한 차이와 경미한 사건을 극단적이고 영구적인 결과로 만드는 예민함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개체 간의 밀접한 상호 의존관계는 시스템 한곳에서 발생한 과부하를 다른 곳으로 급격히 전이시키는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이렇듯 안정과 혼돈의 경계에서 두 가지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복합시스템의 양면성은 거미줄처럼 복잡한 전력망을 대부분 안정적으로 유지하지만 이번 미국의 경우처럼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도 한다.

복합시스템의 예민성은 단지 전력망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연생태계와 인간문명의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비디오테이프의 경우 초기에는 VHS형과 베타(Beta)형이 공존했으나 시장점유율이 조금 더 높았던 VHS형이 시장을 독점하게 됐다.

시계의 경우도 처음에는 지금의 시계바늘 방향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등 통일된 형태가 없었으나, 약간의 수적 우위로 인해 현재의 시계방향이 표준이 됐다.

영문타자기의 자판배열은 더욱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타자기의 자판배열이 타자를 빨리 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오히려 타자속도를 느리게 해 활자막대가 서로 뒤엉키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전동타자기의 등장 이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초기 타자기 시대의 자판배열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결과가 결정될 뿐 아니라 한번 결정되면 바꾸기 힘든 경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제체제는 국가 외에도 정부 간 기구(IGOs).비정부기구(NGOs).다국적 기업(MNCs) 등 수만개의 다양한 행위자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관계가 밀접히 연결돼 있는 복합시스템이다. 이 때문에 국제체제는 전력망처럼 간혹 불안정성을 연쇄적으로 급격히 파급시키기도 한다.

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총격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경우나, 97년 후반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아시아로 급격하게 확산된 것은 복합적 국제체제의 예민함이 지닌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민성에 의해 초래된 결과가 좀처럼 변화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 미래 경쟁력 좌우하는 산업은

따라서 복합적 국제질서 하에서 초기에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국가나 기업이 계속 그 우위를 차지하게 될 가능성이 크며, 한번 뒤처진 국가는 베타테이프처럼 시장에서 완전히 추방될 수도 있다.

미래의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산업이 기술집약적인 정보산업.생명공학 등 초기 연구와 개발비가 막대한 분야인 점을 감안할 때, 복합시스템의 성격을 지닌 현 국제체제 하에서 기술적으로 뒤처진 국가들의 장래는 매우 어두울 수밖에 없다.

전력망의 문제로 야기된 정전사태는 수시간 혹은 며칠 동안 불편을 감수하면 되지만 국제경쟁에서의 탈락은 자칫 수십, 수백년의 고통을 동반할 수도 있다. 외환위기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불필요한 내부갈등으로 인한 국력낭비를 멈추고 국제체제에서의 경쟁에 사활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닌가.

李丞哲 한양대 국제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