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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스타벅스·맥도날드 없는 명상 도시 … 존 레넌·채플린 즐겨찾던 지상낙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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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소도시 오하이 

미국은 체인 공화국이다. 프랜차이즈의 원조이기도 할 뿐더러 세계 곳곳에서 마주치는 맥도날드, 스타벅스 등 체인점들은 그 자체가 미국식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미국 안에서의 위세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시골 마을에도 고속도로 출구 주변엔 어김없이 익숙한 이름의 체인 카페와 햄버거집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 미국에 체인 청정 도시가 있다.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100㎞ 떨어져 있는 오하이(Ojai)다. 맞다. 오자이가 아니라 오하이!

캘리포니아주의 소도시 오하이. 미국에서도 이례적으로 체인점 입점 금지 조례를 제정한 도시다. 자부심 강한 시민들은 오하이의 독특한 분위기를 지키고 싶어한다. '오하이 데이'를 맞은 다운타운 풍경. [사진 오하이관광청] 

캘리포니아주의 소도시 오하이. 미국에서도 이례적으로 체인점 입점 금지 조례를 제정한 도시다. 자부심 강한 시민들은 오하이의 독특한 분위기를 지키고 싶어한다. '오하이 데이'를 맞은 다운타운 풍경. [사진 오하이관광청]

오하이는 인구 약 7500명, 면적 11㎢에 불과한 소도시다. 한국의 ‘읍’과 비슷한 규모인데 2007년 이곳 시의회가 미국에서도 이례적인 조례를 제정했다. 도시 안에 체인점 입점을 금지하는 조례다. 현재 오하이 시내에는 주유소와 은행 외엔 체인 상점을 찾아볼 수 없다. 주유소와 은행마저도 185㎡(약 56평) 이하로 면적을 제한했다. 2007년 법 제정 당시 스콧 아이커 오하이 상공회의소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오하이에 스타벅스가 없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하이만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주민들의 경제활동이 거대 자본에 침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

체인점 없는 다운타운 풍경은 한 세기 전 모습 그대로다.

체인점 없는 다운타운 풍경은 한 세기 전 모습 그대로다.

공식 기록은 없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미국의 첫 체인점 거부 도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하이에는 체인 샌드위치 가게가 하나 있다. 2007년 조례 통과 직전에 문을 연 ‘저지 마이크스 서브스’다. 순전히 공무원 실수 때문에 살아남았다. 당시 시청 직원이 ‘뉴저지에서 온 마이크의 샌드위치 집’이라고 생각해 허가를 내줬다. 베로니카 콜 오하이관광청 홍보이사는 “허가를 내준 뒤 전국에 300 개가 넘는 체인점 중 하나라는 걸 알고는 도시 미관을 고려해 스페인풍으로 외관을 꾸미도록 했다”며 “다행히 직영이 아니라 이곳 주민이 운영하는 가맹점이라 수익 대부분은 지역사회로 돌아온다”고 설명했다.

2007년 체인점 금지하는 조례 제정 #신비한 기 흐르고 사색하기에 좋아

조례 제정 전에도 오하이에는 건물과 간판 디자인을 규제하는 법이 있었다. 시에서 왕복 2차로인 중심가를 4차로로 확장하려다 시민들의 반대로 포기한 적도 있다.

오하이는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도시다. 존 레넌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메디테이션 마운트’에 있는 국제 평화의 정원. [최승표 기자]

오하이는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도시다. 존 레넌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메디테이션 마운트’에 있는 국제 평화의 정원. [최승표 기자]

그래서인지 도시 분위기는 판박이처럼 똑같은 여느 미국 소도시가 아니라 꼭 스페인의 어느 작은 도시 같다. 유리공장을 운영하던 에드워드 리베이가 1917년 화재로 전소된 오하이 중심가에 연 스페인풍 아케이드와 종탑이 그런 느낌을 진하게 전해준다. 예술가들은 아케이드 안에 갤러리와 부티크숍을 열었고, 주민들은 주변에 식당과 카페를 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0년 동안 다운타운의 분위기는 거의 달리지지 않았다.

동서로 길게 뻗은 계곡에 들어앉은 오하이는 평화로운 분위기다. 예부터 신비한 기가 흐른다는 전설이 있었고, ‘미국의 샹그릴라(지상낙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래서인지 영성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찾는다. 인도의 영성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22년부터 86년까지 오하이에서 살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레넌과 오노 요코, 배우 찰리 채플린, 화가 잭슨 폴록도 수시로 오하이를 찾아와 휴식을 누렸다.

메디테이션 마운트의 '국제 평화의 정원' 입구. [최승표 기자]

메디테이션 마운트의 '국제 평화의 정원' 입구. [최승표 기자]

어찌 보면 마냥 심심한 도시를 여행객은 왜 찾을까. 아침에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 할 수도, 급할 때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을 수도 없어 불편한데 말이다. 대신 사람들은 오하이 식으로 먹고 걷고 자는 것만으로 치유를 누린다. 파머스마켓이 열리는 일요일이면 질 좋은 유기농 제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국식 귤과 비슷한 픽시 탄제린, 이탈리아·스페인산에 견줄 만한 올리브 등이 오하이에서 난다. 와이너리도 있다. 이런 싱싱한 농산물로 만든 건강식을 개성 넘치는 식당에서 대도시보다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다.

오하이에서는 유기농을 즐겨 먹는다. 질 좋고 값싼 유기농 전문 식당, 팜투테이블 식당이 많다. 

오하이에서는 유기농을 즐겨 먹는다. 질 좋고 값싼 유기농 전문 식당, 팜투테이블 식당이 많다.

오하이에서는 하이킹이 인기다. 등산복을 빼입은 채 작정하고 산을 타기보다 조용히 명상하며 산책을 즐긴다. ‘메디테이션 마운트’에 좋은 산책로가 있다. 산이 아니라 도시 동쪽 해발 440m에 있는 명상센터다. 이곳에 있는 ‘국제 평화의 정원’을 걸어봤다. 사찰 일주문 같은 건축물을 지나니 아담한 동양식 정원이 있었다. 사람들은 차분히 걸으며 자연경관을 감상하거나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수다를 떨거나 스마트폰을 만지는 사람은 없었다. 고요 속 평화를 누리기 완벽한 정원이었다.

오하이의 대표적인 고급 숙소 오하이 밸리 인 앤드 스파. [사진 오하이관광청]

오하이의 대표적인 고급 숙소 오하이 밸리 인 앤드 스파. [사진 오하이관광청]

오하이에는 근사한 숙소도 많다. 물론 힐튼·하얏트 같은 대형 체인 호텔은 하나도 없다. 대신 미국 스파 리조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오하이 밸리 인 앤드 스파’가 있고, 크리슈나무르티가 살던 집을 개조한 ‘페퍼 트리 리트리트’도 있다. 요가·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숙소도 있다. 이런 숙소 대부분이 음주·흡연을 금하고, 12세 미만은 아예 받지 않는다.

아늑한 분위기와 환상적인 전망이 어우러진 오하이 리트리트 객실. [사진 오하이관광청]

아늑한 분위기와 환상적인 전망이 어우러진 오하이 리트리트 객실. [사진 오하이관광청]

오하이 시민들은 요즘 고민이 많다. 대형 호텔과 식당이 없는데도 관광객이 늘면서 도시가 시끄러워졌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베로니카 콜 오하이관광청 홍보이사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도 좋지만 주민들이 삶의 질을 유지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며 “지금의 분위기를 잘 간직해야 방문객도 오하이의 매력을 발견하고 좋은 기억을 갖고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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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BOX] 걷기 좋은 도시 표방 ‘드라이브 스루’ 금지하는 곳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는 체인점 입점을 금지하는 오하이처럼 체인 상점의 영업을 제한하고 있는 도시가 더 있다. 주민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은 소도시가 대부분이다. 그중 캘리포니아 중부에 있는 샌루이스어비스포(SLO)가 선구적이었다. 자동차를 몰고 음식을 가져가는 ‘드라이브 스루’를 금지하는 시 조례가 1982년에 벌써 통과됐다. 대중교통이 편한 대도시도 아닌데 왜 이런 법을 통과시켰을까. ‘걷기 좋은 도시’를 표방하기에 자동차 중심의 비즈니스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SLO는 1999년 세계 최초로 실내 금연법을 통과시킨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실리콘밸리 인근 도시 팰로앨토에서는 중심가인 캘리포니아 애비뉴에 체인점 진입을 막는 조례를 2015년 9월 제정했다. 기존에 있던 스타벅스나 서브웨이 등은 영업을 계속하도록 했지만 신규 입점은 금지했다. 당시 팻 버트 팰로앨토 시의원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상인들이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떠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오하이(미국)=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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