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보수적 개혁군주’ 정조는 뭘 고민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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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판미동, 440쪽, 1만6000원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된 단어다. 한자어로는 시대착오(時代錯誤)다. 과거를 현재에, 현재를 과거에 적용해 너무 뒤떨어지거나 앞서가는게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다.

흔히 정조( 1752~1800, 1776~1800 재위)를 ‘개혁 군주’라고 한다. ‘개혁 군주’의 ‘개혁’을 정조 시대와 어긋나는 아나크로니즘으로 볼 수도 있다. ‘정조는 보수인가 진보인가’를 묻는 것 또한 아나크로니즘이다. 그를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최고지도자’로 평가하는 것은 ‘공간착오’이자 시대착오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아나크로니즘은 역사학·사회과학이 외면할 수 없는 ‘방법론’이다. 우리는 모든 국사(國史)들이 세계사로 통폐합되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역사적 흐름을 단일 스탠더드로 삼는 ‘역사 패권’의 시대이기도 하다.

정조는 프랑스혁명(1789~1799) 과 동시대 인물이다. 그 시대에 정조는 무엇을 고민했을까. 이를 파악하려면 『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를 읽어야 한다.

요순 시대를 이상으로 삼았던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 사진은 정조 표준 영정이다. [사진 판미동]

요순 시대를 이상으로 삼았던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 사진은 정조 표준 영정이다. [사진 판미동]

고려대 교육학과 신창호가 정조의 『홍재전서』 중 『책문(策問)』을 오늘의 말로 옮긴 게 이 책이다. 정조가 쓴 ‘시험문제집’이다. 총 78문제다. 피시험인은 학자·관리·예비관리들이다. ‘정조가 쓴 책문에 대해 논하시오’라는 식의 짧은 시험 문제가 아니다. 문제마다 여러 쪽 분량이다. 다음과 같은 흐름을 탄다. (1) 정조는 요임금·순임금을 비롯한 역사적 사례들과 유교 문헌을 동원해 질문의 취지를 설정했다. (2) 질문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위상을 자리매김했다. (3) 찬란한 어제를 기준으로 오늘을 개탄했다. (4) 이를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해법을 신하들에게 요구했다.

개혁에도 보수가 있고 진보가 있다. 이 책이 드러내는 정조는 ‘보수적인 개혁군주’였다. 요순 시대를 이상으로 삼았다. 소중화(小中華) 조선에 만족한 제한적 의미의 ‘민족주의자’였다.

반전(反轉)을 도모하는 해석도 가능하다. 정조는 ‘개혁에 미온적인 신하들을 꼼짝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정조는 독서왕이었다. 학자 군주였다. 문헌 장악이 국정 장악이었던 시대였다. 정조는 신하들이 부인할 수 없는 논리와 언어로 신하들을 압박했다.

우리는 『책문』에서 세계사의 흐름에 쉽게 합류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민한 ‘근대성 있는’ 정조를 발견한다.

[S BOX] 정조 가라사대, 알고 있는 건 말하고 말하는 건 실천하라


신창호 교수는 『논어』·『맹자』·『대학』·『중용』을 오늘의 말로 옮기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정조가 신창호 교수를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몇 마디 뽑아봤다.

- 국가의 흥망성쇠는 언로(言路)가 얼마나 열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

- 문명국가로서 우리 조선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뛰어나다.

-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실천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시라.

- 정치는 가난한 사람을 비롯하여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학문은 용감하게 매진하는 것을 중시한다.

- 어떻게 하면 외부에서 밀려오는 욕망을 조절하여 내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까.

- 학문이 소중한 이유는 배워서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환영 논설위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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