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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인천신현고, 학생들에게 수업 선택권 줬더니 잠자는 아이들이 '싹'

중앙일보

입력

“도로규칙 10조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신호등에 표지판을 달아선 안 됩니다. 그러나 신호 확인에 방해되지 않고 오히려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면 표지판을 설치하는 것이 옳습니다.”

학생들이 직접 수업 선택하는 인천신현고 가보니 #'고전' '인문학' '종교학' 등 한 학기 83개 과목 개설 #가정시간엔 장 담그고, 창업시간에 온라인 판매도 #토론, 실습 위주로 흥미 높이고 자기주도력 향상 #교사들 설득,합의 거쳐 2015년부터 3년째 시행 #문재인 대선 공약 ‘고교학점제’ 핵심도 학생 선택권 #

 지난 11일 오전 인천 서구의 인천신현고 2학년 사회 시간. 5개의 사회과목 가운데 이번 학기에 ‘법과 정치’를 선택한 학생 20여명이 배민영(17) 양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배양은 학교 앞 도로 표면에 그려져 있는 '시속 30km' 표시가 야간에 잘 보이지 않고, 페인트칠도 벗겨져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신호등에 표지판을 달자고 주장했다.

 배양은 또 횡단보도가 끝나는 지점의 보행로와 벽면에 노란 알루미늄 스티커를 붙여 이른바 ‘옐로우 카펫’을 깔자고 제안했다. “누가 봐도 횡단보도인 걸 알 수 있게 강조해 놓으면 무단 횡단이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민영양이 속한 팀의 학생들이 제안한 어린이보호구역 강화 방안

배민영양이 속한 팀의 학생들이 제안한 어린이보호구역 강화 방안

 이날 수업에선 배양이 소속된 팀을 포함한 8개 조가 지난 한 달 간 준비해온 정책제안을 각각 발표했다. ‘불법 유흥업소 정비’ ‘안전한 자전거 주행 문화 확립’ 등 내용도 다양했다.

 발표가 끝나자 이다정 사회교사는 교과서의 2단원 ‘정치과정과 참여’에 기술된 ‘주권’의 개념과 내용을 설명했다. 그는 “학교와 지역, 국가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을 가져야만 민주주의가 건강해진다”며 “투표 때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11일 오전 인천신현고 학생들이 인천시에 제안할 정책제안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11일 오전 인천신현고 학생들이 인천시에 제안할 정책제안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장진영 기자

 2015년부터 3년째 신현고가 실시하고 있는 ‘학생 수업 선택제’가 새로운 고교 교육의 롤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과목에 따라 교실을 이동하며 수업을 듣는 교과교실제 운영 학교는 전국 2500여개 학교 중 432곳이다. 그러나 신현고처럼 학생의 수업 선택권이 넓은 학교는 흔치 않다. 이 학교는 학기가 끝날 때마다 학생들의 수요를 조사해 다음 학기 개설 과목을 결정한다. ‘고전’ ‘인문학’ ‘종교학’ 등 일반 고교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업들도 개설되는 이유다.

 특히 이 학교가 강조하는 학생들의 수업 선택권 보장·확대는 문재인 대통령의 교육공약 1호인 ‘고교학점제’의 핵심 원칙이기도 하다. 교육부는 다음달초로 예정된 대통령 업무보고에 ‘고교학점제’ 실행 방안을 포함시켜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같은 날 1학년 음악 시간. 음악실에선 때 아닌 민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천시 무형문화재 전수자인 최미희씨가 학생들과 함께 ‘서곶들 노래’를 연습하는 중이었다. 모내기 때 부르는 토속민요로 학생들은 직접 농민복장을 하고, 모심기 흉내를 내며 노래를 배웠다. 김진아(16) 양은 “수 백년 동안 우리 동네 조상들이 불러온 노래를 배운다는 사실이 매우 재밌다”고 말했다.

11일 오전 인천신현고 학생들이 지역 민요 명창을 초청해 민요를 배우며 수업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11일 오전 인천신현고 학생들이 지역 민요 명창을 초청해 민요를 배우며 수업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처럼 신현고에선 여러 교과목에서 지역사회 주민들이 중요한 선생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1학기 가정 시간에는 재래 된장을 만드는 장인이 교사로 참여해 학생들과 직접 장을 담갔다.

 최영선 교감은 “2학기 창업 수업에선 지역 기업인들을 초빙해 직접 쇼핑몰 홈페이지도 만들고, 1학기 때 학생들이 만든 장을 실제로 판매해봤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학생들이 듣고 싶은 수업을 만들기 위해 학교에선 외부 전문가 영입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정 시간에 학생들이 직접 담근 장 [인천신현고]

지난해 가정 시간에 학생들이 직접 담근 장 [인천신현고]

 학생들의 수업 선택권을 확대하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교실에서 잠자는 아이들이 없다는 점이다. 3학년 이연수(18) 양은 “자기가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해 듣기 때문에 딴짓할 틈이 없다”고 전했다.

 이양은 또 “2학년 때 ‘고전’을 선택했는데, 당시 배웠던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며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던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주관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평범한 공립고였던 신현고가 획기적인 변신을 시도한 건 2014년 이덕범 현 교장이 부임하면서부터다. 이 교장은 "시장에서도 손님이 원치 않는 물건은 팔리지 않는다"며 "수요자인 학생이 원하는 교육을 펴는 것이 학교의 본분"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이 교장은 1년 동안 교사들을 설득했고 이듬해부터 지금과 같은 수업 선택제를 시작했다.

 신현고는 보통 한 학기에 50여개 과목이 개설되는 일반고와 달리 이번 학기에 83개 과목을 준비했다. 학기말에 학생들로부터 듣고 싶은 과목을 조사하고, 방학 중 개설 과목이 결정되면 개학 후에 수업 시간표가 확정된다.

 이렇게 학생들의 요구를 중시하는 신현고의 교육과정이 알려지면서 학교 인기도 높아졌다. 1학년 도호정(16) 양은 지난해 1지망으로 신현고를 선택했다. 인근에서 스페인어를 개설한 유일한 학교라는 게 큰 장점이었다.

 도양은 “수강생이 8명밖에 안 돼 혹시라도 스페인어 강의가 폐강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괜한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장은 “가르칠 교사만 있다면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수업을 개설하는 게 신현고의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최 교감은 "국·영·수 등 입시 교과는 꼭 들어야 하기 때문에 수업 선택권이 100%주어지는건 아니다"면서도 "전체 교과의 30~40%는 학생이 선택할 수 있어 다른 학교에 비하면 선택의 폭이 매우 넓다"고 말했다.

 대부분 고교는 2학년 때 문과와 이과 중 하나를 선택하지만 신현고에선 ^자연이공 ^수리과학 ^인문사회 ^제2외국어 등 4개 과정 중 하나를 결정한다. 각 과정에 따라 개설되는 과목 종류와 이수 단위(학점)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제2외국어 과정 학생은 고교 3년간 제2외국어를 24단위(일반 학생 4단위) 수강해야 한다. 6학기 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주당 4시간씩 해당 수업을 듣는다는 얘기다. 이 교장은 "굳이 외고에 가지 않아도 제2외국어를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수업 방식이 대폭 바뀌면서 학생들의 성적도 대폭 올랐다. 최 교감은 "2~3학년 때 학생 수업 선택제로 공부한 올 2월 졸업생 중 39명이 서울의 주요 10개 대학에 입학했다"며 "지난해(23명)보다 70%나 늘 만큼 성적이 크게 향상됐다"고 소개했다.

인천=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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