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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의 넉넉한 그늘이 아쉬워 - 호암 이병철회장을 추모함 김우중 <전경련부회장·대우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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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해외출장길 미명의 새벽에 접한 비보는 한마디로 충격이었읍니다. 급거 귀국하여 회장님의 영전에 서고 나서도 회장님의 타계가 아직 믿기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회장님은 한국기업의 제1세대를 개척한 인물로서 가위 우리 경제계의 대부로 추앙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람을 키우고, 조직을 다지고, 관리기법을 정착시켜온 빈틈없는 솜씨는 달인의 경지를 이루셨고 이것은 곧 우리 기업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회장님을 한국 경제계가 배출한 거인으로 이름하는데 누가 주저하겠읍니까.
또한 회장님은 매사 합리와 완벽, 그리고 제일을 근간 삼아 항상 더 잘해보고 더 발전해 보려는 의지로 일관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회장님의 강한 집넙과 의지가 작게는 우리나라 기업발전의 초석이 되었고, 크게는 우리사회발전의 동양이 되었음도 어느 누구가 부인하겠읍니까.
회장님은 단순히 기업을 일으키고 확장하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기업의 연구활동과 인재양성등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기업경영의 불모지를 일구셨으며 예술·문화·의료등에 일찍부터 착안하시어 사회적 사명에 소홀할뻔 했던 다른 기업인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셨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장님의 공인으로서의 덕업에 앞서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우리나라 기업인중 가장 존경해왔던 큰 어른을 잃어버린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읍니다. 비정한 사업의 세계로 대변되는 기업활동을 비춰볼 때 분명코 많은 부분에서 회장님과 저는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런 관계에도 불구하고 회장님께서는, 때로는 재계의 선배로서, 때로는 인생의 선배로서 부형처럼 저를 격려해주시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읍니다.
회장님께서는 또한 목전의 대·소사보다는 더 큰 인생의 길을 생각게 해 주셨고 심지어 어떤 부문에서는 앞장서나가라고 애정어린 양보도 서슴지 않으신 거목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운 일, 답답한 일이 있을때마다 찾아가 뵙고 회장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삼성도 잘 되고 대우도 잘 돼야 하지만 나라가 잘 되는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대이.』-회장님과 나누던 수많은 훈훈한 대화들이 아직 귓전에 생생한데 이제 회장님은 제 곁을 떠나고 안계십니다.
회장님의 거목다운 품모가 어디 저 한사람에 한했겠습니까. 거목이 드리운 그늘이 몹시도 넉넉하였기에 항상 회장님을 그늘삼아 인생여로의 곤고함을 달래왔던 수많은 지인들이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아쉽기만한 오늘의 상황에서 모두 회장님과의 영결을 아쉬워하고 있읍니다.
돌이켜보면 옛시인의 영탄처럼 회장님의 생애는 영욕이 반반이었습니다. 경제계의 거인, 사회의 거목으로서 한시대를 풍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동안의 정변과 혼란을 겪어으면서 격랑의 고비마다 회장님은 비난받는 계층의 표적이 되는 불운을 감내하셔야만 했습니다. 회장님은 그때마다 표정하나, 몸짓 하나, 음성 하나 변치않으시고 의연하게 대처해 오셨읍니다. 이것은 지도자가 위기에 처했을때 마땅히 취해야할 처세훈을 몸소 보여준 수범지교였읍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회장님의 뜻과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은 속속 증명되고 있습니다. 설령 오늘 현재 이해가 미진한 부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회장님의 신념대로 시간이 더 지나면 세상이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본시 어리석은데가 있어서 너무 큰 것은 없는것처럼 느낄때가 있고, 정말 귀한 존재는 그 효용을 망각할 때가 있읍니다.
이제와 생각건대 회장님의 인생이 영욕으로 점철되고 회장님의 인품이 세상에 다소 왜곡되게 투영된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사회의 미성숙 탓이요, 사람들의 우매함에도 이유가 없지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회장님은 영도 욕도 다 버리시고 영원한 안식을 찾으셨읍니다.
이제 우리사회도 성숙기로 접어들고 있고 우리 경제도 선진권에 진입하고 있는 이시점에서 회장님을 보내야만하는 저로서는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5년만 더 계셨어도 선진국의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며 보람을 만끽하실수 있었을텐데, 그 아쉬움을 무어라 필설로 표할수 있겠읍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누구나 가야할 길, 보내는 저희들로서는 한없이 가슴아픈 길, 아무도 걸음을 옮겨놓고 싶지않은 길을 회장님께서는 홀연히 가셨읍니다. 삼가 두손 모아 명복을 빕니다.
회장님께서 이 땅에 펼쳐놓으신 큰 뜻과 일궈 놓으신 기업들은 가신 이의 유지를 받들어 계승 발전될 것임을 저는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대한 회장님의 염원은 남아 있는 저희 기업인들이 있는 힘을 다해 성취해 냄으로써 이 땅에 선진조국을 꽃피워 나가겠읍니다.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1987년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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