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위 부장 "저의 자리는 고통이자 슬픔의 자리"…블랙리스트 재판서 피해자 진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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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부장. 이 자리는 예술인들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자리로, 저의 기쁨이자 자랑이었습니다. 하지만, 2015년 배제 리스트가 시작된 이후 저의 자리는 고통이자 슬픔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김기춘 실장에게 박근형과 이윤택ㆍ고선웅ㆍ한강 편견 없이 볼 그 날 오길" #"100보 명령 받았을 때 30보, 50보 줄여 걸은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 황병헌) 심리로 열린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정무수석의 ‘블랙리스트 재판’에 증언대에 선 장용석(47)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 창작지원부장(현 문화누리부장)은 신문이 끝난 뒤 미리 준비한 A4 2장 분량의 글을 꺼내 낭독했다. 재판장은 "피해자 진술권이 있으니 읽어도 좋다”고 낭독을 허락했다.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이미 지원심의에서 결정된 사업을 되돌려야 하는 등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실행해야만 했습니다. 개인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러한 현실의 대한민국이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김기춘 실장님, 오래 전부터 많이 뵙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뵙고 싶었던 때는 오늘 이 자리, 이 법정에서가 아니라, 2015년 배제리스트가 한창일 때였습니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 이 지시를 내린 사람을 직접 만나, 왜 이것이 말이 안 되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싶었고, 토론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김기춘 실장님도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남북분단과 6.25전쟁, 오랜 군사독재 시절이 없었더라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없었다면, 실장님도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박근형과 이윤택, 고선웅, 한강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언제고 좋은 날에, 새로운 날에, ‘박근형의 청춘예찬을, 이윤택의 '문제적 인간 연산’을, 고선웅의 ‘조씨 고아-복수의 씨앗’을,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편견 없이 보실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문체부의 A실장, B국장님!
새 정부에서는 대한민국을 살리는 명령을 내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배제 리스트가 한창일 때, 근 1년 간, 제가 받은 유일한 지시는 “어떻게 배제할 것인가”였습니다. 한국문학 활성화 방안이나, 연극계 활성화 방안, 창작음악 활성화 방안과 같은 지시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무척 슬픈 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살리는 명령이라면 밤새워서라도, 아니 목숨을 바쳐서라도 할 텐데, 지난 날 지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둠이 지났으니 훌륭한 정부가 되어, 모든 공정하지 못한 지시는 막아주시고, 대한민국을 살리는, 평화를 만드는 지시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예술인 여러분”을 호명하는 대목에서 장 부장의 목소리는 떨렸다.

어떤 분들은 우리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비유하기도 하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히만만큼 권한이 있지도 않고, 아이히만처럼“시킨 일을 했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우리의 슬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산하기관으로서, 정부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오른쪽으로 가야합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100보 명령을 받았을 때, 그 명령이 부당한 경우, 70보, 50보, 30보로 줄여서 가는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지난 어둠의 시대, 1984의 시대, 보폭을 줄여 가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예술인 여러분의 양에 차지 않는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가 자기 말 값을 잃어버린 시대, 새롭게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씀 정도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말인 것 같습니다.

부하 직원들에 대한 사과와 감사의 말까지 전한 장 부장의 글은 "어둠의 때가 가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들의 가슴에, 대한민국에, 갈라진 땅 한반도에 어서 평화가 오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말로 마무리 됐다. 이 광경을 지켜 본 박영수 특별검사팀 관계자는 “예상치 못한 진술에 가슴이 먹먹해졌다”며 “블랙리스트 집행을 강요받았던 문예위 등 문체부 산하기관 공무원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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