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과 추억] 25년 전 한·중 수교 협상 이끌고 서명한‘중국 외교의 대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중국 외교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첸치천(錢其琛·사진) 전 중국 부총리가 9일밤 지병으로 베이징 자택에서 숨졌다고 신화통신이 10일 보도했다. 90세.

첸치천 전 부총리 1928~2017 #1992년 장쩌민 지시로 평양 방문 #김일성에게 한·중 수교 방침 통보 #‘한·중·일 30인회’ 초대 중국 단장

첸 전 부총리는 올해로 25주년을 맞는 한·중 수교의 주역으로 한국에도 지인이 많다. 1988년 중국 외교부장에 취임, 2003년 3월 부총리에서 물러나기까지 15년간 중국 외교를 이끌었다. 그래서 외교부 후배들 사이에선 지금도 ‘중국 외교의 대부’로 불린다. 중앙일보와 중국 신화사,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공동으로 2006년 발족한 ‘한·중·일 30인회’ 초대 중국 측 단장으로 활동했다.

1928년 중국 텐진에서 태어난 첸 전 부총리는 10대 시절인 42년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혁명활동에 투신했고 49년 신중국(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에는 공산주의청년단 간부로 활동했다. 외교활동에 투신한 것은 55년 주 소련 대사관 이등비서관으로 유학생 담당 업무를 맡으면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하방(下放)을 경험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외교부 간부로 승진을 거듭하며 대변인과 외교부 부부장(차관), 부장을 차례로 거친 그는 죽(竹)의 장막을 걷고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의 입과 얼굴로 국제무대에 널리 알려졌다. 중국 외교부가 서방 국가들을 본떠 대변인 제도와 정례 브리핑 시스템을 도입했을 때 초대 대변인 직을 맡기도 했다.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오른쪽)이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한·중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오른쪽)이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한·중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고인은 소련 해체와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로 냉전이 종결되던 세계사의 전환기에 중국 외교를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시기 북방외교에 나선 한국 정부와 한·중 수교 협상 업무를 총괄하며 수교를 마무리지었다. 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과 역사적인 한·중 국교정상화 문서에 서명한 인물이 바로 첸 전 부총리다. 고인의 회고에 따르면 한·중 수교 협상은 91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장관급 회의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을 당시 박철언 체육청소년장관과 처음 얘기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수교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92년 7월에는 장쩌민 당시 주석의 지시로 한·중 수교 방침을 통보하기 위해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났다. 그가 “수교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운을 떼자 김일성은 한동안 말을 잇지못했다는 게 고인의 회고다. 첸 전 부총리는 훗날 “김일성 주석을 몇 차례 만난 것 가운데 가장 짧은 경험이었다”고 술회했다.

고인은 외교관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발탁되고 부총리 직책에까지 오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첸 전 부총리 이후 중국 외교부장 출신은 정치국원보다 아래 단계인 공산당 중앙위원과 국무위원(외교담당)까지 승진하고 은퇴하는 게 일반적인 관행으로 굳어지고 있다. 고인은 외교 현장에서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외교의 방향을 제시한 저서 『외교십기』(外交十記·10가지 외교이야기란 뜻)를 남기기도 했다. 이 가운데 다섯번째 이야기가 한·중 수교에 얽힌 경험담이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