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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워킹맘 다이어리

김밥을 말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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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수련 기자 중앙일보 산업부장
박수련이노베이션랩 기자

박수련이노베이션랩 기자

봄 소풍 철이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김밥을 만들었다. 김밥은 먹긴 쉬운데 만들 땐 손이 참 많이 간다. 특별할 것 없는 ‘오리지널 그냥 김밥’인데도 새벽부터 움직여야 제 시간에 끝낼 수 있다. 아침 잠 많은 내가 김밥 몇 줄 때문에 서둘러 일어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묵직했다. 흔하디 흔한 김밥집도 우리 동네엔 없다. 그래서 매년 옆구리가 종종 터지는 김밥을 말아 왔다. 이번에도 재료를 한가득 사놓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어둠 속에서 쌀밥을 짓고 시금치를 데치고 달걀 지단을 만드는 거대한 남편의 그림자. 모르는 체하고 30분 더 누웠다. 그날 난 어느 때보다 더 가뿐하게 김밥을 말았다. 아이에게도 올해 김밥은 특별히 더 맛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자랑거리는 아주 가끔이다. 맞벌이 부부의 삶이란 게 해결해야 할 문제의 연속이다 보니 부딪힐 일도 많다. 다만 남편과 합의를 본 건 있다. ‘우리는 똑같이 일하고 돈 벌고 있으니 집안일도 남자 일과 여자 일을 나눌 게 없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맞벌이를 했던 친정 부모님도 그렇게 살았다. 어릴 적 내 교복을 비롯한 모든 옷의 다림질은 아버지 몫이었다. 주방을 안방처럼 생각하는 아버지는 지금도 요리를 거뜬하게 한다. 그는 한마디로 ‘센 척하지 않는 남자’였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하지만 이런 경험과 별개로 사회에서 만난 상당수는 ‘센 놈’이 되길 원했다. 공무원·기업인·언론인 등등 가릴 것 없이. “남자는(‘사람은’이 아니었다!) 센 놈이 되어야 한다”는 샤우팅을 들은 적 여러 번이다. 공통점은 이들 가운데 여성을 동등한 동료로 인정하는 사람도 별로 없더라는 것. 그들에게 워킹맘은 직장 일에만 집중할 수 없는 사람들, 뭔가 부족한 ‘나보다 덜 센 놈’일 뿐이다.

“설거지는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 했다던 대통령 후보의 변(辯)은 “내가 세 보이려고 그랬다”였다. 그런 강박은 평생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지난 25일 JTBC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도 ‘센 놈’ 퍼레이드는 계속됐다. 설거지 발언의 그는 ‘지지율 1위 후보’에게 “동성애는 국방전력을 약화시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는 지지율 1위 후보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는 군이 약해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되묻지 않았다.

그 이상한 질문 덕분에 나는 지지율 1위 후보가 가진 센 것과 약한 것에 대한 편견을 읽었다. 큰 소득이다. 논란이 일자 그는 “성희롱의 우려 때문이었다”고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성희롱은 군이든 어디서든 엄벌해야 할 범죄일 뿐 군을 약하게 만드는 것과는 별개다. 아들만 둘 워킹맘인 나는 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센 놈 타령을 그만 듣고 싶다. 센 놈 몇몇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든 적은 별로 없었지 않나.

박수련 이노베이션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