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테러 재판관 딸 의문사 … “현장서 북한제 담배꽁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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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83년 10월 버마 아웅산 테러 직후 한국과 버마 합동조사단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1983년 10월 버마 아웅산 테러 직후 한국과 버마 합동조사단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1983년 10월 버마(현재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과 관련한 재판에 참여했던 현지 판사의 딸이 의문사했으며, 북한 측이 이에 관여한 정황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부가 11일 공개한 외교문서 23만여 쪽(1474권)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정부는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매해 심의 해 공개하고 있다.

정부, 30년 전 외교문서 23만 쪽 공개 #1986년 미 대통령특사 만난 전두환 #“핵 3발만 있으면 북이 대화 응할 텐데”

86년 12월 16일 주제네바 대사가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외교 전문 ‘버마 대사 면담 보고’에 따르면 테러 당시 버마 외무성 정무총국장이었던 U 주제네바 버마 대사는 “당시 사건 재판에 관여했던 판사의 딸이 약 1년 반 전(85년 6월께)에 일본 유학 중 변사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전두환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보도진 17명이 사망했다. 버마는 북한 공작원 2명을 범인으로 체포해 같은 해 12월 사형을 선고했다. 이 중 한 명은 곧 처형됐다. 해당 전문에 따르면 이 재판과 연관 있는 판사의 딸이 판결 1년 반쯤 뒤 숨졌다는 것이다.

U 대사는 “사망 현장에서 북한제 담배꽁초가 발견됐다. 그러나 진상은 밝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관여한 정황은 있지만,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83년 11월 아웅산 테러 수사 결과를 발표한 직후 버마는 베이징 주재 대사를 통해 중공 측에 사건의 전모를 알렸다고 한다. U 대사는 “얼마 뒤 김일성이 급작스레 중공을 방문한 목적 중 하나는 그 사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중 양국이 냉전기였던 80년대 중반부터 관계 개선을 추진해 온 사실도 드러났다. 86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 헬무트 콜 서독 총리에게 “총리께서 도와주신다면 한국과 중공 간에 당장 수교가 안 되더라도 통상대표부라도 설치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에서 전쟁 억지를 위해 시급하기 때문”이라면서다. 92년 한·중 수교 6년 전의 일이다.

전두환-콜 회담 두 달 뒤 중국이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 북한 측 의사를 타진한 사실도 확인됐다. 86년 6월 30일 주독 대사가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당 총서기가 독일을 방문해 콜 총리와 면담했을 때 ‘한국의 대중공 관계 개선 희망과 관련, 북한과 협의했으나 북한이 완강히 반대했다’고 말했다”고 돼 있다. 당시 후 서기는 “북한이 자결 정신과 자존감이 강해 조심하고 있는바, 지나치게 되면 대북 영향력이 상실될까 우려한다”고 말했다.

86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에드워드 라우니 미 대통령특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미국이 전략적 방위구상(SDI)을 개발하면 미·소 협상이 잘된다. 한국에도 핵무기 3개만 있으면 북한이 남북대화에 응해 오는 원리는 같은 것”이라고 말한 대목도 공개됐다. 전 전 대통령은 “물론 (우리가 핵을) 절대 사용하지 않지만”이라고 강조했다.

유지혜·김민상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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