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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짧아서 더 길었던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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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호 08면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주연 옥주현, 박은태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중년 여인에게 어느날 낯선 사랑이 다가와 이렇게 속삭인다면 어떨까. 딱 4일간 나눈 사랑을 평생 간직하다 죽어서 재가 되어 만난다는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4월 15일~6월 18일 충무아트센터 대극장)가 뮤지컬로 부활한다. 1993년 출간돼 전세계 천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으로, 1995년 매릴 스트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동명 영화로 우리 기억에 깊이 각인된 이야기다.

그런데 혹시 저 거창한 고백은 불륜 미화용 립서비스 아닐까.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도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성이 용납 못해도 감정이 납득해 버리는 사랑이란 게 인간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 실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옥주현(37)과 박은태(36), 두 주연 배우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뮤지컬 무대는 좀 다른 것 같다. 불륜 미화는커녕 ‘불륜’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해졌다. 오히려 책과 영화보다 디테일한 장치를 잔뜩 심어놓은 대본은 그저 한 여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불가능한 사랑이면서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라 강요하지는 않는 무대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평가는 관객의 몫이다.


“솔직히 제가 프란체스카를 하고 싶어요.”(박)

박은태는 작품 속 로버트 킨케이드와 달리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작품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모든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된다”며 미주알고주알 작품 해설을 늘어놓다 자꾸만 눈시울을 붉혔다. 상대적으로 쿨한 옥주현에 의하면 ‘기승전 감수성’이다.

“은태씨와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새 감수성이 너무 풍부해졌더라고요. 저는 동선도 맞춰야 하고 계산할 게 많아 바쁜데 옆에서 보면서 계속 감동하고 있어요.(웃음) 사실 저도 연습 때 많이 울어요. 지금 울고 공연 때 안 울어야죠. 덤덤히 풀어놔야 관객이 젖게 될 테니까요.”(옥)

“처음엔 남편 버드에게 감정이입이 됐는데, 연습할수록 씬마다 모든 인물에게 빠져들도록 대본이 쓰여진 걸 느껴요. 보통은 역할에 빠지는데 이번엔 작품에 빠졌달까요. 다른 배우 연기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지켜보게 되죠. 로버트는 울면 안되는 캐릭터인데 마지막 장면은 못 참을 거 같기도 해요.(눈물)”(박)

우리 기억 속에는 대배우들의 이미지가 아직 남아있어요.
옥: 저도 영화를 봤으니 이미지가 남아 있지만 사실 책이 먼저잖아요. 책을 보면서 각자 상상하는 장면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저도 제 상상을 펼치고 있어요. 보다보면 영화를 잊게 되실 거예요.


박: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넘을 수 없기에 처음엔 고사했었어요. 연습 중 내린 결론은 전혀 다른 이미지를 찾자는 거죠. 커다란 현장감이 있는 작품이라 자칫 영화를 따르다 극 자체 에너지가 떨어질 수 있겠더군요. 영화는 이스트우드의 진솔한 무게감이 부각되지만 뮤지컬은 음악과 무대의 힘을 믿고 유쾌한 느낌으로 가려구요. 대신 내면의 상처가 깊은 서브텍스트로 진실성을 표현해야죠.

결국 ‘미워할 수 없는 불륜’인데.

옥: 첫 리딩 후와 두 번째 리딩 후 연출님이 똑같은 감상 숙제를 내셨어요. 처음엔 ‘안 되는 사랑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는데, 깊이 들어갈수록 기준 자체가 의미 없어지더군요. 프란체스카로선 자기 거울 같은 사람을 만난 거라 생각해요. 같은 꿈을 꾸던 첫사랑을 전쟁으로 잃고 선택이 없는 상황에서 남편을 만난 건데, 18년을 그렇게 살다가 로버트에게서 잊고 살았던 내 모습을 거울 들여다보듯 보게 된 거죠. 그런 거울 같은 사랑이기에 평생 간직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박: 불행한 여자에게 백마 탄 재벌이 나타나는 뻔한 스토리라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겠죠. 프란체스카는 불행한 여인이 아니고 자기 삶을 후회하지 않는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자예요. 로버트도 결국 그런 모습을 사랑한 것이구요. 유시민 작가도 가정에 대한 헌신과 갑자기 찾아온 운명적 사랑이 같은 무게일 수 있다는 얘길 하셨던데, 그런 철학적인 얘기인 것 같아요. 그 이후에 그녀가 정말 행복하게 사는 장면이 나오는데, 남편이 어렴풋이 알면서 기다려주는 느낌도 너무 좋아요. 꿈을 이뤄주지 못한 미안함과 표현은 서툴지만 아내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지거든요.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문고리’보다 더 극적인 장면 기대하세요”

가장 궁금한 건 프란체스카가 차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는 영화의 명장면 처리다. 역시나 무대에선 구현되지 않는단다. 하지만 이들에 의하면 ‘영화보다 더 극적인’ 장면이 탄생할 예정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 마음이 어떨까’ 싶어 오금이 저릴 정도예요.(또 눈물) 저런 마음을 간직한 채 70살 할머니가 돼 ‘4일간의 사랑을 간직했었다’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누가 불륜이라고 할까요. 객석에 ‘아름답죠’ 하고 강요하지는 않아요. 그저 ‘한 사람에게 그런 일이 있었고, 그 마음을 간직했었습니다’만 전달하는 거죠.”(박)

결국 현모양처로 남는 게 올드한 느낌도 드는데.

옥: 따라갔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봤어요. 갔어야지라는 생각도 들구요. 하지만 18년 일궈논 것들을 쉽게 끊을 수 없었겠죠. 갔으면 꿈꾸던 삶을 살았겠지만, 따라가지 않아서 불행하게 산 게 아니니까요. 그녀는 마음이 넓고 품을 수 있는 폭이 넓은 여자거든요.


박: 프란체스카가 좋은 역할인건 로버트에 대한 사랑 뿐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도 크기 때문이에요. 다른 색깔 사랑 중에 결국 하나를 선택한 거지, 사랑 포기하고 가정 택했다면 흔한 아침드라마 느낌이겠죠. 로버트도 사랑하지만 18년 세월을 같이 보낸 사람도 사랑한거라 생각해요. 사랑과 헌신이란 이분법적 개념이 아니고 색깔이 다른 사랑 사이의 선택인 거죠.

‘카포네 트릴로지’ 등 신선한 형식의 연극으로 유명한 김태형 연출은 첫 대극장 뮤지컬을 연극적인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무대로 구현중이다. “문고리는 안 나와도 명장면이 가득하다”는 게 이들의 이구동성이다. “무대가 심플하지만 연극적인 상상력으로 움직여요. 의자 두 개에 차 소리만으로 자동차가 되는 식이죠. 아, 지붕 달린 다리는 나옵니다. 예상치못한 방식으로요.”(박)

“대소도구를 움직이는 것도 앙상블들인데, 도구 밀고 오는 분들이 무생물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일 하면서 프란체스카를 주시하고 있는 마을사람들이죠. 둘만 있었으면 하는 장면에 많은 사람이 올라와 있는 것도 그래서예요. 모두 없는 듯 지켜보고 있다는 걸 표현하는 거죠. 그만큼 디테일한 공기까지 디자인하시는 거 같아요.”(옥)

음악은 어떤가요.

박: ‘제2의 손드하임’이라는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이 토니상을 받은 음악이지만 솔직히 처음엔 낯설었어요. 대극장에선 보통 200퍼센트 쏟아내는데, 이건 정반대로 가요. 극이 가다가 노래 들으라 강요하는 흔한 뮤지컬에 비해, 음악이 극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극과 배우를 감싸주는 느낌이랄까. 1막 엔딩조차 ‘엥? 끝나나?’ 싶게 끝나지만, 확신하건데 2막 피날레 때는 ‘지금 내 맘에 뭐가 들어온거지?’ 싶을 거예요. 박수 요구가 아니라 마음을 후비니까요. 보통 해소하고 가신다면 뭔가 담아가게 되실 거예요.


옥: 이야기로 치면 마침표가 아니라 말줄임표 느낌이죠. 제가 부르는 곡들은 전반적으로 ‘샤콘느’ 장르인데, 우울하고 슬픈 마이너 춤곡이에요. 소프라노보다 메조가 잘 구사하는 장르인데, 바이올린보다 첼로가 더 사람소리 같듯 드라마틱하고 풍부한 소리를 내야 하죠. 내지르거나 쏘는 건 뒤로 하고 다른 걸 꺼내 써야 하니 어려워요. 지르는 건 감추고 만회할 수 있는데 이건 어디서 만회가 안되니 무조건 섬세하게 수놓듯이 꿰어서 가야하죠.  

“디테일한 공기까지 디자인하는 연극적 무대”

두 사람은 2012년 ‘황태자 루돌프’ 때 상대역으로 첫 호흡을 맞춘 지 5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해 초 ‘엘리자벳’ 때 ‘살인자와 피살자’로 만나긴 했지만 대사를 섞진 못했다고. 박은태가 “당시 주현씨와 연기하는 게 로망이였다”고 회상하자 옥주현은 “은태씨는 그때부터 괴물같았다”고 화답했다. “어딜 가느냐니까 발레 배우러 간다더군요. 사실 모든 배우에게 발레가 필요한데 실천은 어렵거든요. 저도 한참 뒤에 배우면서 ‘박은태, 정말 난놈이다’ 생각했죠. 그래서 은태씨가 태가 달라요. 힘든 노래하면서도 자유로워 보이는 이유죠.”(옥)

오랜만에 상대역으로 만났는데요.

옥: 그때도 차갑고도 뜨거운 드라이아이스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간 아빠가 되고 많은 경험을 하더니 더 뜨거워진 것 같아요. 원래 노력하는 모습은 1등이었는데, 거기에 감성적인 부분까지 풍부해져서 정말 좋은 배우가 된 거죠.


박: 솔직히 그때는 제가 너무 여유가 없었어요. 저 하기에 급급해서 상대와 주고받을 줄 몰랐죠. 여배우보다 군중·다리·마차같은 무생물과 케미가 더 좋단 얘기를 들을 만큼 혼자 하는 데 익숙했어요. 지나고 나니 아쉽고 미안했는데, 이제는 좀 깨쳐서 교감할 때 더 신나요. 5를 줬어? 난 7을 줘볼까. 별을 주네? 네모를 줘볼까. 이런 느낌이 들도록 제게서 끌어내주는 깊이있는 배우님이 주현씨예요.  

미성이라 로버트 킨케이드의 거친 야성미는 아니죠.

옥: 야성미 없어도 되요. 가부장적인 틀에 박힌 남자들이 많았던 시대에 오히려 부엌일 도와주고 부드럽고 다정한 모습에 반하는 거니까요. 거친 듯 섬세한 남자라서 은태씨와 더 잘 어울려요.


박: 결국 프란체스카에게 가닿는 건 공감능력이거든요. 늠름하고 거친 매력보다 그녀의 과거의 꿈과 지금의 공허한 삶에 공감해주는 사람인 게 중요하죠. 근데 연출님이 자꾸 옷을 벗으라고 하셔서 고민입니다.(웃음)

옥: 벗어야돼. 내가 벗을 순 없잖아.(웃음) 씻는 장면이 있거든요. 요즘 밥도 잘 안 먹고 잠깐 쉴 때도 푸쉬업을 미친 듯이 하는 걸 보니, 결국 벗겠죠. 브루스 추는 장면에서 어제 잡아보니 며칠 전보다 더 말랐어요.

박: 객석에서 저 남자 따라가고 싶은 맘이 ‘1’이라도 들어야 되는데 딜레마예요. 몸 만드느라 살이 빠지니까 ‘늠름’과는 멀어지고 보호본능을 일으킬 것 같아서요.(웃음) 

내한공연을 제외하곤 대형 뮤지컬 경쟁작이 없어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 심지어 원캐스트라 부담이 클 것 같지만, 두 사람은 “끈끈한 호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원캐스트가 오히려 스트레스가 덜해요. 연습시간도 훨씬 많고, 아무리 같은 역이라도 사람이 다르면 호흡이 다르거든요. 오랜만에 하면 더 힘들어요. 근육이란 게 습관적으로 써주면 상하지 않지만, 쉬다가 끌어오려면 에너지가 더 들죠.”(옥)

“이런 배우가 으뜸인건데 저는 하루 쉬는 게 편하긴 해요. 모든 공연에 다 쏟아내다 보니 컨디션 조절에 실패할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섬세한 작품은 매일 같은 배우를 만나 극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큰 것 같아요.”(박)

인터뷰를 지켜보던 제작사 프레인글로벌의 여준영 대표는 캐스팅에 대해 “공동제작사인 쇼노트 김영욱 대표가 원캐스트를 강력히 주장했다”면서 “뮤지컬 제작에 입봉하는 작품에 최고 배우들이 함께 해 줘 든든하고 영광”이라고 했다. “관객에게 제일 좋은 걸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유사시 대타로 나서는) 언더나 얼터도 없어요. 그만큼 두 분을 믿으니까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프레인글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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