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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역사 북한산 백운산장 다음달 국가 귀속이라니..." 북한산 백운산장지기 이영구ㆍ김금자씨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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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북한산 인수봉 아래 산 기슭에 자리한 백운산장의 6일 오후 모습. 우상조 기자

북한산인수봉아래 산기슭에자리한 백운산장의 6일 오후 모습.우상조 기자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836m)와 인수봉(해발 804m)을 찾는 등산객과 산악인들에게는 아지트이자 오아시스 같은 곳이 있다. 인수봉 아래 해발 650m 산기슭에 위치한 백운산장이다. 93년 역사를 간직한 전국 첫 민간 산장이자 대피소다. 나무 탁자와 의자를 실내외에 갖추고 음료와 컵라면·과자·국수 등을 파는 휴게소이기도 하다.

전국 첫 민간 산장이자 대피소, 북한산 등산객과 산악인의 아지트이자 오아시스 # 부부는 아들까지 4대 걸쳐 백운산장에 살며 운영, 다음달 시설 기부채납 기한 # 국리공원관리공단, “시설 기부채납에 응하지 않을 경우 명도소송 진행 방침” #

6일 오후 백운산장 내애서 우두커니 서 있는 주인이자 산장지기인 이영구(오른쪽)씨와 김금자씨 부부. 우상조 기자

6일 오후 백운산장 내애서 우두커니 서 있는 주인이자 산장지기인이영구(오른쪽)씨와 김금자씨 부부. 우상조 기자

국유지에 시설 기부채납 조건으로 조성됐던 백운산장이 다음 달이면 국가로 귀속된다. 산장지기이자 주인인 이영구(86)씨는 6일 “지금처럼 백운산장에서 등산객과 산악인을 마주하며 사는 게 마지막 남은 소원인데…”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백운산장의 별미인 잔치국수. 우상조 기자

백운산장의 별미인 잔치국수. 우상조 기자

백운산장은 1992년 6월 화재로 다시 지어졌다. ‘건축 후 시설을 사용한 뒤 2017년 5월 기부채납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이씨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측과 약정을 맺고, 지상 2층(연면적 180㎡) 규모로 만들었다. 앞서 이씨의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인 1924년 처음 자그만 산장을 지어 거주하며 매점을 했던 게 백운산장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이씨의 아버지가 33년 산장을 다시 지어 살며 2대째 운영했다.

이씨는 초등학교 6년 중퇴 후 광복 이듬해인 46년 백운산장으로 올라와 61년째 살고 있다. 아내 김금자(77)씨는 64년 이씨와 결혼, 53년째 산장을 지키며 5남매를 길러 모두 출가시켰다. 30년 전부터는 장남 이건(52·경기도 성남시)씨가 일주일에 3∼4일가량 산장으로 올라와 부모의 일손을 도우며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정부 소유로 넘어가게 되면 등산객과 산악인들의 쉼터와 대피소이자 추억의 공간인 백운산장이 사라지거나 현재의 모습을 잃게 될 거예요….”

이씨는 “25년 전 공단과의 시설 기부채납 약정 당시 마지 못해 지장을 찍었던 게 못내 후회스럽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운산장은 산악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준 성금으로 지었기 때문에 산악인 모두의 집이나 다름없는데…”라며 고개를 떨궜다.

93년의 오랜 역사가 사진과 기록으로 남아 있는 백운산장 내부 모습. 우상조 기자

93년의 오랜 역사가 사진과기록으로 남아 있는백운산장 내부 모습. 우상조 기자

부부는 백운대와 인수봉 일대에서 등반 및 조난사고 시 사상자 100여 명을 구조한 일을 보람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80년대 초 산악구조대가 발족되기 전까진 북한산 구조대 역할을 해 왔다고 했다. 아내 김씨는 “집 안의 이불과 모포 등을 응급 구호용으로 모두 사용하는가 하면 죽과 밥을 끓여 먹이며 생명을 살려낸 일들이 소중한 기억”이라고 했다.

백운산장 입구에 고 손기정 선생이 ‘白雲山莊’ 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우상조 기자

백운산장 입구에 고 손기정 선생이‘白雲山莊’ 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우상조 기자

이씨는 “백운산장은 지금도 폭우와 폭설 등으로 고립된 등산객이나 인수봉을 찾는 수많은 산악인들의 대피소 겸 숙박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부는 “1935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고 손기정 선생께서 써준 ‘白雲山莊’(백운산장) 현판이 다음달 내려지는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백운산장 2층에 있는 산악인과 등산객을 위한 대피소. 우상조 기자

백운산장 2층에 있는 산악인과 등산객을 위한 대피소. 우상조 기자

이와 관련,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은 “시설 기부채납에 응하지 않을 경우 명도소송을 진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또 “기부채납이 이뤄지면 안전진단 실시 후 문제가 없을 경우 대피소 기능을 유지하고, 이씨가 희망할 경우 산장 관리인으로 채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요즘 밤잠을 제대로 못 이룬다는 부부는 “산장이 정부 소유로 넘어가게 되면 당장 오갈 곳도 마땅치 않는 형편”이라고 했다.

고양=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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