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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꿈나무들이 자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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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사회2부장

이상언사회2부장

지난해 초 지상파 방송 예능프로그램에 잠시 등장한 당시 초등학교 3학년생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그 학생이 말하는 장면이 정지 상태로 캡처된, ‘꼰대 유망주’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이 화면 자막에 적혀 있는 그 학생의 말은 이랬다. “나 3월에 4학년이니까 내 말 잘 들어라.” 이 학생, 학교에 형·누나보다 동생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녹록지 않은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을 것 같다.

대학·연예계 등 곳곳서 청년들 ‘똥군기’ 문화에 젖어 #세월호·박근혜 사태 근본적 토양은 꼰대 재생산 구조

최근 한 유명 사립대의 학생은 학교 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렸다가 ‘OOO대 꼰대 유망주’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었다. 글 내용은 이렇다. ‘새터 장기자랑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도 물론 장기자랑을 해야 한다고 들었을 때는 너무 하기 싫었는데 실제로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내기 동기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썩 나쁜 기억만은 아닌 것 같네요. 물론 장기자랑을 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고, 반강제로 시키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정도의 약한 강제력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사회에 나가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절대 안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새터’는 새내기 배움터의 약자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해당한다.

이 글에 대한 비판자들은 그 안에 ‘나도 왕년에 좀 해봤는데 나중에 추억이 될 거야’ ‘이다음에 사회생활 잘하려면 이 정도는 겪어봐야 해’라는 전형적인 ‘꼰대’ 의식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새 학년이 되면 대학교에서 ‘똥군기’ 논란이 어김없이 불거진다. 후배들의 미래 사회생활을 염려하는 선배가 많아서인지 음주 강요, 호칭 압박, 복장 규제 등 종류도 다양하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실감 지수는 높지 않다.

학교만 그런 것도 아니다. TV에 등장한 걸그룹 멤버가 “청소는 막내가 하는 거고요”라는 말을 발랄한 표정으로 던진다. 인사성, 솔선수범은 연예계에서 주로 후배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직업 선수들이 모인 프로 스포츠계의 상황도 비슷하다. 다른 어느 곳보다 창조성이 필요한 학교와 예능계 곳곳에서 꼰대 꿈나무, 꼰대 유망주(젊은이들은 이를 줄여 ‘꼰망주’라고 부른다)가 자라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무리한 선체 개조, 램프 부분(배에 차량이나 화물이 실리는 곳) 균열 등이 유력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 선원이 그 문제를 언급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식으로 문제가 제기되지는 않았고, 선주 회사에서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비서들은 “아니되옵니다”를 외치지 않았다. 애당초 그럴 사람들을 청와대에 들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비서들은 혹여 지시사항을 빠뜨릴까봐 열심히 적고 녹음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적용한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 중에서 범법 행위 가담을 거부한 이는 한두 명 정도였다.

이화여대는 상대적으로 학내 민주주의 수준이 높은 학교다. 군대에 갔다온 교수가 적어서인지 교수 집단이나 교수와 학생 사이에 ‘까라면 까’식의 문화가 퍼져 있지 않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총장과 보직교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정유라씨의 입학과 학점 관리를 위해 움직였다. 교수가 대학원생을 동원해 시험 성적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화여대라서 학생들의 의혹 제기와 대학원생들 증언으로 진상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서열주의 꼰대문화는 사람들이 모인 곳 대부분에 있다. 그래서 운동에 소질 있는 학생이 운동부를, 능력 있는 젊은이가 회사를, 글 재주가 있는 이가 문단을, 정치 지망생이 정당을 떠나는 일도 흔하다. 참을성을 발휘해 남은 이 중 일부는 꼰대 꿈나무로 자라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국민소득 3만 달러 벽을 못 넘은 이유일 수도 있다.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고 새 대통령을 뽑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자기 앞에 조용히 촛불을 켜야 한다.

이상언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