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은 그런 그에게 10년 전 산사의 기억을 되살려 준 영화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과거 하나쯤은 갖고 있잖아요. ‘어느날’은 외면했던 자신의 아픔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회복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김남길의 말이다.
처음엔 강수가 미소의 영혼을 본다는 설정 때문에 출연을 망설였다. 극 후반부 강수와 미소는 생사의 경계에서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그는 “이런 진중한 소재를 판타지 장르로 푼다는 게 가볍지 않을까, 선입견이 있었다”고 했다. “이윤기 감독의 진득한 멜로영화들을 좋아해 왔다”는 김남길이 첫손에 꼽는 이 감독의 영화는 ‘여자, 정혜’(2005)다. “‘여자, 정혜’에서 (주연 배우) 김지수 선배님이 담배 피우며 길을 걷는 장면들을 좋아해요. 배우와 배경과 모든 감정들이 미장센이 되어 여백에 녹아드는 그 여운은 정말 길었죠. ‘어느날’은 이 감독님 작품 중 상업적인 고민이 가장 많이 담긴 영화거든요. 처음엔 이 감독님 전작의 색깔과 달라서 혼란스러웠어요.”
불과 몇 개월 뒤 반전이 일어났다. 다시 시나리오를 읽은 김남길은 북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김영하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2017년 개봉 예정, 원신연 감독)을 촬영할 때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연쇄살인마(설경구)와 모종의 관계인 또 다른 연쇄살인마 역을 맡았다. “아이러니한 게, ‘어느날’을 읽은 건 우울하거나 힘들기는커녕 내 안의 폭력성을 극대화해 연기하던 시기였거든요. 결코 살인마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시대가 만들어 낸 사회상·인간상이라는 생각에 ‘인간의 결핍이란 뭘까’ 고민하던 때였죠. 뭔가에 마음이 동했는지, ‘어느날’이 달라 보였어요. 처한 상황이나 심정에 따라 더 오래 남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근데 ‘나 이렇게 죽을 것 같이 아프니까 알아봐 줘’는 아니”라며 김남길이 소주로 비유를 들었다. “한두 잔 먹고 잔을 툭 내려놓는, 아픔이 있는데 그걸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를 상상하며 연기했어요. ‘파이란’(2001, 송해성 감독)이 떠올랐는데, 알고 보니 송해성 감독님이 쓴 시나리오를 이 감독님이 각색했더군요.”
아내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수와 미소의 멜로로 보이는 것만큼은 경계했다. 극 중 미소가 강수를 부르는 호칭을 ‘아저씨’로 정한 것도 최대한 거리감을 두기 위해서다. 강수가 미소의 손을 그대로 투과하는 빗물을 보며 혼비백산하고, 미소와 티격태격 잔잔한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들이 그가 홀로 슬픔을 삭이는 순간들과 교차한다. 한순간도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우리 삶처럼.
강수는 울지 못하는 남자다. “원전 폭발 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소시민의 영웅으로 등 떠밀리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울분을 주체하지 못했던” 전작 ‘판도라’(2016, 박정우 감독)의 재혁과 다르다. 김남길은 “(감정을) 감추는 게 습관이 돼 울 때도 꺽꺽 울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강수가 안쓰러웠다”고 했다.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는 사람들이 가끔은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요. 슬플 때 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는 편이거든요. 애써 잊어 보려는 행위 자체가 힘들기도 하잖아요. 막상 스스로 무너지거나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겁나기도 하고요.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워져 좀 단단해지고 되돌아볼 용기가 생길 때쯤, 멀찍이서 들춰 보고 자학하든 연민하든 그랬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아픔을) 정면으로 부딪치지 못하는 거죠.”
대중에게 사랑받아 온, 캐릭터가 강하고 아픔이 있는 작품들을 주로 추구하다 매너리즘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는 김남길. ‘어느날’에서 후줄근한 양복에 제멋대로 수염을 기른 채 미소에게 휘말리는 강수는, 최근 ‘해적:바다로 간 산적’(2014, 이석훈 감독) ‘도리화가’(2015, 이종필 감독) ‘판도라’ 등에서 그가 도전해 온 다양한 시도 중 하나다. 물론, 무심결에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에 잠기거나 어슬렁어슬렁 앞서가는 모습에서 예의 “홍콩 누아르 같은 김남길표 분위기”가 배어날 수도 있겠지만. 차기작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감정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섬뜩한 눈빛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라의 뒷모습이 살벌하게 드러나는 장면을 위해 촬영 당시 체격을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원상 복귀다. 아니, “작품을 위해 일부러 살을 뺀 걸 제외하면, 요즘처럼 마른 적이 없을” 정도다. 그에게 넌지시 강수 같은 인생의 결정적인 어느 날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어느 날이야 늘 있는 것 같아요.” 그가 씩 웃었다. 하기야, 입버릇처럼 “나는 긍정적”이라 말하는 배우가 아닌가. 김남길의 삶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