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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룡이 아두를 구해 유비가 천하를 놓쳤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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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만가 속에 고향은 멀어지고
송곳바람만 우우우 뼈 속을 파고든다
십 만 목숨 어지럽게 눈물 흘리는데
앞길은 아스라이 보이지 않는구나!
전쟁터 아닌 곳은 그 어디인가
길섶엔 새로 생긴 무덤길만 빼곡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흙물을 핥노니
고향 텃밭 묵은 김을 다시 뽑기 위함이다

서기 208년. 천하통일을 위한 조조의 50만 대군이 남하를 시작한다. 형주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유장의 항복으로 조조군은 형주성에 무혈입성 한다. 유장의 가신들은 제 한 몸 지키기에만 바빴다. 파죽지세(破竹之勢). 조조의 군영은 사기가 충천하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 유비는 조조의 대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유비군이 강릉으로 후퇴하니 십 만 명의 백성이 따라나섰다. 갈 길은 멀고 하루해는 짧았다. 조조는 배은망덕한 유비를 반드시 척살하고 싶었다.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밤낮으로 추격을 명한다. 사태는 급박해지고 유비의 장수들은 몸이 달았다. 백성을 버리고 몸부터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진언하자 유비가 울면서 말한다.

조조의 50만 대군 [사진 e301닷컴]

조조의 50만 대군 [사진 e301닷컴]

큰일을 할 사람은 항상 백성을 근원으로 삼는다. 이렇게 백성들이 나를 믿고 따르는데 어찌 이들을 버린단 말이냐! 이 자리서 죽더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유비의 이 말에 온 백성이 울고 온 산천이 울었다. 유비는 당양(當陽)에서 조조군과 부닥쳤다. 2천의 군사로 어찌 기세등등한 조조군을 막을 수 있겠는가. 장비가 쫓겨 달아나 겨우 몸을 숨겼다. 그 사이 가족과 장수들은 물론 따르던 백성들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유비의 비통함은 통곡으로 이어졌다.

조운은 유비 가솔을 보호하였는데 유비의 두 부인과 아들 아두(阿斗)를 잃은 죄책감에 정신이 혼미하였다. 병사 수 십 명과 함께 다시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간옹과 감부인을 구해내고 포로로 잡힌 미축도 살렸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조운은 혈혈단신이었지만 죽을 각오를 하니 오히려 편안하였다. 마침내 미부인과 아두를 찾아냈으나 미부인은 상처가 깊어 아두를 부탁하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조자룡이 아두를 갑옷 속에 품고 말을 달리자 조조의 정예군이 막아섰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 길을 비키지 않는 자 모두 죽으리라!

조자룡의 눈에서 섬광이 일고 창검을 쥔 손은 번개와 같았다. 조조도 감탄하며 조자룡을 사로잡으라 한다. 그러나 상산의 호랑이는 잡히지 않고 조조의 장수 50여명을 말에서 떨어뜨리며 적진을 빠져나갔다.

조자룡이 아두를 구하는 모습 [사진 CCTV]

조자룡이 아두를 구하는 모습 [사진 CCTV]

전포에 핏자죽 넘쳐 갑옷까지 붉게 스며드니 血染征袍透甲紅
당양에서 누가 감히 그와 대적하겠는가. 當陽誰敢與爭鋒
예로부터 적진 뚫고 주인을 구한 이는 古來衝陳扶危主
오직 상산의 조자룡뿐이었네. 只有常山趙子龍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무아지경의 무예솜씨를 보이며 아두를 구해내는 모습에 빠져들지 않을 독자는 없다. 조자룡이 아두를 구한 장판파(長板坡)는 호북성(湖北省) 당양(當陽)에 있다. 옛날 장판파 자리에는 상수리나무가 울창했다고 한다. 그래서 옛 이름도 ‘역림장판(?林長板)’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때까지 계속된 벌목으로 민둥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장판파공원만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다. 공원 앞 삼거리 한복판에는 아두를 품에 안고 말은 탄 채 긴 창과 청룡검을 들고 있는 조자룡의 동상이 늠름하다. 삼국지 조자룡의 무대인 당양에 온 것이 실감났다.

장판파공원 입구와 조자룡상 [사진 허우범]

장판파공원 입구와 조자룡상 [사진 허우범]

10여년 만에 다시 찾아오니 많이 변했다. 새롭게 단장한 공원에 들어서니 3층 누각인 자룡각이 고풍스럽다. 자룡각을 돌아 공원의 중앙 뜰로 나오니 힘찬 필치의 ‘장판웅풍(長板雄風)’ 비석이 우뚝하다. 조자룡의 무용담은 이곳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이미 명나라 만력 10년(1582년)에 ‘장판웅풍’ 비석을 세울 정도로 오래되었다. 현재의 비석은 중일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47년에 다시 만든 것이다. 장판파공원은 이 비석을 중심으로 1980년대에 조성한 것이다.  

공원 뜰에는 백마를 탄 채 창을 들고 에워싼 조조군을 무찌르는 조자룡의 석상만이 우뚝하다. 예전에 왔을 때는 조자룡의 용감무쌍한 무예에 넋이 빠진 듯 바라보는 조조, 장판교를 막고 호령하는 장비, 아두를 땅바닥에 던지는 유비 등 장판파 전투 현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 놓은 소상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조자룡의 용맹한 모습만 표현해 놓았다. 장판파 전투 장면을 상상하기에는 예전의 모습들이 훨씬 즐거울 듯하다.

공원 주위의 상점이나 가게 그리고 호텔은 ‘장판파’니 ‘자룡’이니 하는 상호를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가히 조자룡의 고향보다도 더 조자룡을 사랑하는 도시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조자룡의 무용담을 알리는 ‘장판웅풍’ 비석 [사진 허우범]

조자룡의 무용담을 알리는 ‘장판웅풍’ 비석 [사진 허우범]

장판파공원서 북서쪽으로 1㎞ 지점에 낭랑정(娘娘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미부인이 조자룡에게 아두를 부탁하고 투신한 곳이다. 후세 사람들이 우물 옆에 미후사(靡后祠)라는 사당을 지어 그녀의 넋을 위로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물도 사당도 흔적이 없다. 대신 우물이 있었을 곳에는 작은 정자만 덩그렇고, 미부인이 아두를 껴안고 숨어있었다는 태자교(太子橋)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미부인은 장판파 전투 이전에 죽었으니 조자룡에게 아두를 부탁한 것은 미부인이 아닌 감부인이었을 것이다. 장판파 주위를 동서로 1㎞ 정도 뻗은 낮은 산이 있다. 병풍을 둘러친 것 같다하여 금병산(錦屛山)이라고 하는데 소설에서는 경산(景山)이라 하였다.

조자룡이 아두를 구해낸 태자교터 [사진 허우범]

조자룡이 아두를 구해낸 태자교터 [사진 허우범]

이곳은 조조가 전투를 지휘한 곳인데 조자룡이 겹겹의 포위망 속에서도 종횡무진 용맹을 떨치는 모습을 보고 생포하라고 한 곳이다. 이 덕분에 조자룡은 화살을 맞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인재에 욕심 많은 조조의 눈에 들어 화를 면한 셈이니, 인재는 아군이던 적군이던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는다.
진수는 조자룡이 장판파 전투에서 ‘아두와 감부인을 재난에서 면하게 하여 아문장군으로 승진했다’고 간단하게 기록하였다. 나관중은 이러한 기록과 구전을 바탕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관우 장비와는 또 다른 조운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조자룡이 아두를 구해낸 일(單騎救阿斗)을 천고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는 잡극과 경극에까지 이어져 오늘날도 ‘상산 조자룡’이란 이름을 흠모하게 하였으니, 나관중이야말로 천부적 재질을 타고난 작가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만약 당시 조자룡이 아두를 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무능한 아두 대신 다른 이가 촉한의 황통을 이어받았다면, 삼국의 승자는 조조가 아니라 유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념에 젖어본다.

신으로 아두를 구하는 장면을 묘사한 자룡상 [사진 허우범]

신으로 아두를 구하는 장면을 묘사한 자룡상 [사진 허우범]

소설을 몇 번 읽은 사람들이라면 관우와 장비보다도 조운을 좋아한다.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관우와 장비의 활약이 더 용감무쌍하였다. 또한 조운은 마초, 황충, 위연에게도 미치지 못했는데 어째서 그를 더 좋아할까? 그것은 조운이 진솔하기 때문일 터이다.  


조운의 자는 자룡(子龍)이다. 상산(常山) 진정현(眞定縣) 출신으로 현재의 하북(河北)성 석가장(石家庄) 근처의 정정(正定)사람이다. 180㎝가 넘는 훤칠한 키에 무인으로서의 웅장함과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도 올바르고 행동도 단정했다. 주민들이 원소를 따르고 있던 시기에 조운은 용병을 이끌고 공손찬에게로 갔다. 공손찬이 모두 원소를 따르는데 어찌하여 나를 따르느냐고 떠보았다.

천하가 흉흉하여 어느 누가 맞는지 알 수 없기에 백성들은 보이는 것만을 따르는 실정입니다. 우리 고을은 어진 정치를 하는 분을 따르는 것이지, 원공(袁公)을 멀리하매 장군을 따르는 것은 정녕코 아닙니다.

조운의 삶의 철학은 어진 정치를 펴는 인물을 주인으로 모시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세에 자신의 주인을 찾기 위해 원소를 생각했었고, 공손찬에게도 갔지만 조운의 철학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반면에 유비야말로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되는 주군임을 알고 평생 유비를 위해 헌신한다.

새롭게 단장한 장판파공원 모습 [사진 허우범]

새롭게 단장한 장판파공원 모습 [사진 허우범]

조운은 ‘온몸이 담덩어리’인 ‘범 같은 장군’이다. 그는 소설 전편에 걸쳐 많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장판파에서 유선과 감부인을 구해낸 것 외에는 커다란 전과(戰果)는 없다. 이는 조운이 유비나 제갈량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하느라 독자적인 작전을 맡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조운이 유비와 제갈량의 신변경호를 전담한 것은 뛰어난 무예를 갖추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조운은 무장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성과는 다르게 대의(大義)를 인식하고 이를 우선시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겸손하고 신중하며 공정무사 하였다. 또한 항상 충직하였으며 대의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직간(直諫)할 줄 알았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고 성도(成都) 주변의 땅을 장수들에게 주려고하자 민심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나, 오를 정벌하려 할 때에도 전략적인 정세를 설명하며 적극 만류한 것도 조운의 충직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북 정정현 고향에 있는 조자룡상 [사진 허우범]

하북 정정현 고향에 있는 조자룡상 [사진 허우범]

조운의 이러한 특성이 호위업무에 적격이었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유비의 시작은 ‘도원결의’로 대변되듯 유협심으로 뭉친 일군의 불량배집단 수준이었다. 그러다보니 지휘체계나 군신관계의 질서는 유명무실하였다. 삼국정립을 통한 한나라의 부흥을 꾀하는 유비가 조직의 확장에 따른 국가제도의 정비를 앞두고 관우와 장비에게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항상 ‘불효보다 불충이 더 큰 죄’라고 외치며 군신관계로 깍듯이 대하는 조운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의(情義)로움은 꿀이 넘친다. 그래서 꿀맛에 빠져 꽃잎이 시드는 것도 모르다가 함께 떨어진다. 정의(正義)로움은 가시가 많다. 그래서 멀리하다가 일이 다 틀어진 후에야 그 뜻의 진정(眞正)함을 안다. 전자는 달지만 오래가지 않고, 후자는 쓰지만 영원하다.  

글=허우범 작가
정리=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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