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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분노' 이상일 감독, 그의 영화 세계

중앙일보

입력

이상일 감독의 영화는 크게 ‘악인’ 전과 후로 나뉜다. ‘악인’ 이전, 그러니까 데뷔작 ‘푸를 청’(1999)부터 ‘보더 라인’(2002) ‘69 식스티 나인’ ‘스크랩 헤븐’(2005) ‘훌라 걸스’(2006)까지는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청춘영화를 만들었다. 54분짜리 멜로영화 ‘푸를 청’은 재일 교포 소년(마시마 히데카즈)이 주인공이다. 이 감독은 “일본에 사는 내가 일본인들과 다른 ‘재일 교포’라는 점은 영화를 만드는 데 매우 득이 된다”고 말한다. “어떤 인물이나 세상을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푸를 청’ 이후의 작품에는 재일 교포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지만, 내가 재일 교포로 살면서 느낀 것들은 내 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영화 '분노' 스틸

영화 '분노' 스틸

무라카미 류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69 식스티 나인’은 1969년 일본 나가사키의 뜨거운 여름이 배경이다. 고등학생인 켄(츠마부키 사토시)과 그 친구들은 학교와 인근 미군 시설에 대항해 그들만의 ‘즐거운 혁명’을 일으킨다. ‘스크랩 헤븐’은, 꿈꾸던 경찰이 됐지만 따분한 서류에 파묻혀 사는 카스야(카세 료)의 짜릿한 일탈을 그린다. 일본 내 주요 시상식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훌라 걸스’는 1965년 폐광 위기를 맞은 탄광촌의 소녀들이 훌라 댄스라는 색다른 꿈에 도전하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 작품.

영화 '분노' 스틸

영화 '분노' 스틸

‘악인’부터는 분위기가 다르다.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악인’과 ‘분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동명 할리우드 서부극(1992)을 리메이크한 ‘용서받지 못한 자’(2013)는 전부 끔찍한 살인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사회는 그들을 “악인”이라 손가락질하고(악인), “살인마”라 수군거리고(용서받지 못한 자), 끊임없이 의심한다(분노). 잘 들여다보면, 그 살인자들은 도덕적 신념과 가치 체계가 무너진 ‘현대 사회가 만들어 낸 괴물’에 가깝다. 그의 영화는 그 ‘괴물’의 존재를 통해 궁극적으로 그들을 살인자로 내몬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고, ‘과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묻는다. “‘훌라 걸스’까지 내 영화에 등장하는 갈등은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악인’부터는 선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갈등이 벌어진다. 그건 자신과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이 감독의 설명이다.

막부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제 막 메이지 시대가 시작된 19세기 말 홋카이도의 외딴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용서받지 못한 자’ 역시 “현대 일본의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연출했다”고 말하는 이 감독. 의지할 데 하나 없는 인물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는 과정을 치열하게 비춘다.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이 영상에 그대로 배어나도록 연기한 배우들의 에너지가 돋보인다. 이 감독은 촬영 전 몇 번이고 리허설을 반복하고, 수십 번씩 촬영을 거듭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배우들이 캐릭터의 상황에 빠져 있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분노’에서 동성애자 역을 맡은 츠마부키 사토시와 아야노 고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하루씩 게이 클럽 접수원으로 일했다. 배낭여행족을 연기한 모리야마 미라이는 촬영 전 몇 주 동안 무인도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

영화 '분노' 스틸

영화 '분노' 스틸

신념을 잃어버린 시대, 각 개인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처절한 사투. 그것이 이 감독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끝’은 아니다. ‘악인’ ‘용서받지 못한 자’ ‘분노’는 결말에서 길 잃은 인물들에 대한 희미한 희망을 비춘다. “희망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상황에서든 그것을 찾아내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속되는 좌절에도 끊임없이 희망을 구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 아닐까. 어쩌면 난 영화를 통해 그러한 인간의 가능성을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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