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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제를 이끈 총리傳(2)] 지팡이 짚고 총리 맡은 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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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2대 총리는 김일성의 ‘오른팔’ 김일(1910~1984)이다. ‘오른팔’이란 표현은 김일성이 직접 언급한 말이다. 김일의 본명은 박덕산. 김일성이 해방 직후 그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김일성은 “내 이름에서 두 자를 내어 주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이 '내 오른팔'이라고 불러 #항일혁명열사로 '농업상' 맡기도 #국가 제1부주석 등 요직을 거쳐 #1972년 정무원 총리로 경제 책임져 #4년간 아픈 몸을 이끌고 전국 누벼 #김정일 "몇 천t 석탄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

김일성과 김일(사진 오른쪽). [사진=조선중앙TV 캡처]

김일성과 김일(사진 오른쪽). [사진=조선중앙TV 캡처]

김일은 늘 자신의 이름에 대해 “‘김’자는 수령님을 언제나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뜻이고 ‘일’자는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김일’이라는 이름을 한평생 오직 수령님 한 분 밖에 모르는 혁명전사로서 신념의 표시로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대목은 조총련 월간지 『조국』(2004년 11월호)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김일은 북한에서 ‘수령 결사옹위의 1번수’로 불러지고 있다. 당과 수령의 영도체계를 세우는 것을 삶의 과업으로 삼고 투쟁해 왔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1번수’라는 칭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에게 붙여 준 정치적 평가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지난해 5월 열린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일성· 김정일 다음으로 항일혁명투사 9명을 한 명 한 명 언급했다. 그 가운데 최현, 오진우, 오백룡 등 쟁쟁한 항일혁명투사들을 제치고 김일을 가장 앞세웠다. 북한에서 그의 정치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김일은 함경북도 어랑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일성을  처음 만난 곳은 1936년 가을 중국 지린성 장백현에 있는 곰의골 밀영에서다. 당시 김일은 중국 공청(공산주의 청년동맹) 연길현 위원회 서기였고,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장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을 만나기 이전에는 1932년 초부터 지하당 및 대중 단체 사업을 시작했고 1935년 10월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했다.


6.25전쟁 이후 김일은 1954년 3월부터 내각 부수상 겸 농업상으로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기초건설에 전념했으며 1959년 1월부터 내각 제1부수상으로 활동했다. 일각에서는 그를 두고 당과 수령의 지시를 듣는 즉시 이행한다고 해서 ‘당 정책집행의 제1선 돌격투사’라 불렀다.

북한은 1972년 헌법 개정으로 내각을 정무원으로 바꾸었다. 김일성은 6.25전쟁 이후 북한 경제를 이끌다시피 한 정준택(1911~1973)이 병으로 앓기 시작하자 정무원 총리 자리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당시 김일성의 최측근에 있던 혁명1세대들은 60~70대 고령이 돼가고 있었다.

고민 끝에 김일성은 정준택의 후임으로 1950년대 농업상을 역임했던 김일을 선택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김일이 1965년부터 앓았던 질환이 1971년 8월 다시 악화된 것이다. 하지만 병은 그에게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1972년부터 병마와의 싸우면서 4년간 정무원 총리를 맡았다.


북한은 71년부터 진행된 6개년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 과업으로 ‘3대 혁명소조운동’을 제시했다. 3대혁명은 사상, 기술, 문화 부문에서 현대적 기술을 갖추고 김일성 유일사상으로 무장하며 사회주의 인민으로서 건전한 생활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의식개혁 운동이었다.

김일성이 제안한 ‘3대 혁명소조운동’은 생산 현장의 생산력 증대운동과도 연계돼 있었다. 산업 전반을 공업화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기계화를 통해 근로자 해방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 발전과 직결된 과제였다. 트랙터와 자동차 생산을 늘리고 농업과 경공업 부문에서 현대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 바로 이러한 노력에 해당된다.

김일 전 정무원 총리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지팡이를 짚으며 안주탄광연합기업소 갱막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김일 전 정무원 총리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지팡이를 짚으며 안주탄광연합기업소 갱막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하지만 이런 노력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1974년 오일쇼크의 여파로 북한 경제에 ‘쓰나미’가 불어 닥친 것이다. 중공업 우선정책을 유지해 오던 북한에게 오일쇼크는 수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승승장구하던 북한 경제가 꼬꾸라지던 시기이며 남북한 경제가 역전되는 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은 운신하기 힘든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전국 각지를 다니며 경제 사업을 지휘했다. 농사철에는 농촌에 나가 농업정책을 철저히 관철하도록 했고 겨울철에는 동해안 함경남도 신포시에 나가 물고기 수송조직 사업을 관장했다.

아울러 전력증산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청천강 화력발전소 건설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1976년 정무원 총리에서 물러난 뒤 국가 제1부주석을 맡을 때였다. 당시 김일은 “직무가 달라졌어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책임자로 파견해줄 것을 자처하고 현지에 나갔던 것이다. 이런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김일이 몇 천만 Kwh의 전력이나 몇 천만 t의 석탄과 결코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원로”라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4년 3월 김일 전 정무원 총리의 사망 30주년을 맞아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있는 그의 반신상에 화환을 보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4년 3월 김일 전 정무원 총리의 사망 30주년을 맞아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있는 그의 반신상에 화환을 보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북한은 1984년 김일이 사망한 뒤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 맨 위쪽에 김정숙(김일성 부인) 등과 같은 라인에 그의 반신상을 놓았다. 가족들 가운데 동생 박성철(1913~2008)은 김일이 1976년 물러난 정무원 총리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국가 부주석까지 역임했다. 아들 박용석(1928~2007)은 노동당 검열위원장을 맡았다.

이경주 인턴기자 lee.kyou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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