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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아닌 음악 꿈나무, 시스템으로 거목 만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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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07면

 [창간 10주년 기획]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 40년

1 2003년 12월 금호 영재 콘서트가 끝난 후 참가자들과 함께한 고 박성용 회장(가운데). 2 2015년 내한한 독일 첼리스트 율리안 슈테켈이 금호 영재 마스터 클래스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3 1998년 제1회 금호 영재 콘서트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고(故) 권혁주(무대 맨 오른쪽)가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1 2003년 12월 금호 영재 콘서트가 끝난 후 참가자들과 함께한 고 박성용 회장(가운데).2 2015년 내한한 독일 첼리스트 율리안 슈테켈이 금호 영재 마스터 클래스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3 1998년 제1회 금호 영재 콘서트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고(故) 권혁주(무대 맨 오른쪽)가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4 2014년 금호악기은행 수여식. 왼쪽부터 임지영, 박삼구 회장, 김범준. 5 ‘찾아가는 사랑의 금호아트홀’ 완도 노화초등학교 공연 장면.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중앙포토]

4 2014년 금호악기은행 수여식. 왼쪽부터 임지영, 박삼구 회장, 김범준.5 ‘찾아가는 사랑의 금호아트홀’ 완도 노화초등학교 공연 장면.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중앙포토]

9일 저녁 서울 광화문 금호아트홀. 클라리넷과 피아노의 들뜬 선율이 300석 규모의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카미유 생상스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E플랫 장조 Op.167’.

90년대부터 클래식 신예 양성 #연주의 완벽함보다 #열정·성장 가능성 더 평가 #조성진·손열음·김선욱·임지영 … #세계 클래식 음악계 뒤흔들어

반주를 따라 한가롭게 떠다니던 클라리넷 소리가 어느새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이날 무대에 선 클라리네티스트는 지난해 12월 독일 클래식 윈드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콩쿠르에서 2위와 함께 특별상을 수상한 김우연(25).

세계적인 연주자 마틴 프로스트, 자비네 마이어와의 협연 등 최근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히 활동 중인 떠오르는 신예다.



2009년 금호 영아티스트 콘서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김우연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사장 박삼구)이 발굴한 음악 영재 중 한 명이다. 김우연을 비롯해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젊은 클래식 음악가의 상당수가 재단이 운영하는 영재·영아티스트 콘서트를 통해 데뷔했다. 2015년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조성진(23), 같은 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기악 부문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22)을 비롯해 손열음·김선욱(피아노), 클라라 주미 강·김봄소리(바이올린), 고봉인·문태국(첼로) 등 ‘금호 영재’ 출신들이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뒤흔들고 있다. 재단 설립 후 40년 만에 이뤄낸 눈부신 성과다.

고 박성용 회장의 클래식 사랑이 심은 씨앗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뿌리는 그룹 창업주인 금호(錦湖) 박인천(1901~84) 회장이 1977년 설립한 금호문화재단이다. 창립 당시엔 장학 사업에 집중했던 재단이 클래식 영재 발굴 프로그램을 시작한 건 90년대. 클래식 음악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박성용(1932~2005) 회장의 의지가 컸다.

50년대 미국 예일대 유학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박성용 회장은 90년에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을 모아 금호 현악4중주단을 창단했다. 이후 연주팀의 해외 순회 연주 등에 동행하면서 ‘한국 클래식 음악의 수준을 높이려면 영재를 키워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고 98년 만 14세 미만의 음악 영재를 선발해 독주 기회를 주는 ‘금호 영재 콘서트’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만 15~25세의 젊은 음악가들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금호 영아티스트 콘서트’ 프로그램도 선보였다.

박성용 회장의 클래식 사랑은 지극했다. 박 회장을 보좌했던 그룹 전 임원은 “회장님 자택에서 열린 직원 초대 연주회에 간 적이 있는데, 큰 거실에 가구 하나 없고 피아노와 앰프, 접는 의자 50개만 딱 있더라. 집안 전체가 음악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영재 발굴 프로그램을 만든 후에는 직원들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어린 연주자들을 챙겼다. 영재들의 콘서트가 열리면 직접 표를 구매해 공연을 관람하고 “연주자에겐 박수가 가장 큰 힘”이라며 가장 먼저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어린 음악가들이 해외 콩쿠르에 출전하면 직접 현지까지 찾아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금호 영재 출신으로 97년 제3회 차이콥스키 국제청소년콩쿠르에서 첼로 부문 1위를 차지했던 첼리스트 고봉인(32)은 “박 회장님의 격려가 음악을 계속하는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직접 와 주신 것은 물론 외국 연주회 등에서 만나면 늘 푸근하게 웃으며 안부를 물어 주셨어요. 음악을, 그리고 어린 연주자들을 진심으로 아꼈던 분이었죠.”

콩쿠르 형식의 오디션은 지양

영재 오디션은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열린다. 회당 선발 인원은 정해져 있지 않고, 악기별 심사위원 4~5명이 만장일치로 선택한 연주자만 선발이 된다. 영재를 고르는 금호의 첫 번째 원칙은 ‘잠재성’이다. 재단의 음악사업을 담당하는 박선희 팀장은 “실수가 없는 깔끔한 연주보다 10~20년 후에 좋은 연주자로 성장할 수 있을까를 평가해 달라고 심사위원들에게 요청한다”고 했다. 여러 차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바이올리니스트 김의명 한양대 교수는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기술적으로 뛰어나다”며 “본인이 연주하는 음악에 얼마나 깊이 빠져드는가, 자신만의 감정을 담아 연주할 수 있는가 등 연주자로서의 ‘끼’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설명했다.

다른 기준은 한 시간 정도의 독주회를 스스로 구성하고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는가다. 유명 악곡의 하이라이트 등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사람은 많지만 ‘스토리’를 가진 무대를 선보이는 것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연주자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98년 재단의 첫 번째 영재 오디션에서 선발돼 콘서트를 했던 피아니스트 손열음(31)은 “그 당시에는 검증되지 않은 어린 아이한테 독주회를 열어주는 시리즈가 전무했기 때문에 금호 영재 콘서트는 정말 감사하고 소중한 기회였다”고 했다.

수십억원대 명품 고악기 무료로 대여

클래식 음악 분야는 수십 년 전만 해도 부모의 재력이나 지극한 관심이 없으면 성과를 내기 힘들었던 분야였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영재 육성 시스템은 실력과 잠재력이 있으면 ‘금수저’가 아닌 아이들도 대형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재단 측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경우 장학 프로그램과 병행해 영재들에게 유학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했다.

특히 현악기 연주자들에는 명품 고악기를 무상으로 임대하는 ‘금호악기은행’ 프로그램이 호평을 받는다. 재단은 93년부터 악기 하나에 수십억원대에 이르는 명품 바이올린 과다니니(Guadagnini)나 첼로 마지니(Maggini) 등 재단이 보유한 15점의 고악기를 오디션을 통과한 이들에게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 1794년산 주세페 과다니니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지영은 “세계 무대 연주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좋은 고악기”라며 “재단의 대여 프로그램 덕분에 각종 콩쿠르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재 콘서트에서 재능을 발휘한 영재들에게는 ‘금호 라이징 스타’나 해외 오케스트라 초청 공연 협연 등 계속적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영재 출신들로 구성된 ‘금호아시아나솔로이스츠’ 활동, 항공권 지원, 무대 매너를 교육하는 ‘영 뮤지션 매너스 스쿨’, 세계적인 음악가들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는 ‘마스터 클래스’ 등 연주자들의 성장 과정을 따라 ‘맞춤형 지원’을 한다.

40주년을 맞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앞으로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 무대에 한국인들을 진출시키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재단이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를 활용, 영국 런던이나 독일 드레스덴 등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에 한국 연주자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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