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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브루투스 너마저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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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정치부 차장

고정애정치부 차장

정치학자인 이언 브레머가 며칠 전 사진 한 장을 트윗했다. 시저 샐러드용 드레싱 통에 칼이 꽂힌 모습이었다. 그러곤 이렇게 썼다.

“이데스 오브 마치(the Ides of March)는 정치학자들에겐 크리스마스와 같다.”

이데스는 원래 한 달의 중간을 가리킨 말이다. 1년에 12번이 있다. 하지만 이데스 오브 마치, 즉 3월 15일만은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2000여 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어론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당한 날로서다. 암살단 60명의 지도자가 카이사르가 아끼던 브루투스였다. 정치사적으로 극적인 하루였다. 결과적으로 로마 공화정이 제정(帝政)으로 바뀌었다. ‘칼 꽂힌 시저’ ‘크리스마스’란 브레머의 비유가 통한 까닭이다.

서양에선 이날이 변주되곤 하는데 셰익스피어의 비극 ‘줄리어스 시저’가 대표적이다. 당대인들은 카이사르가 숨질 당시 별말을 안 했다고 기록했다. 그저 토가를 끌어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을 뿐이란 게다. 셰익스피어가 누군가. 불멸의 문구를 남겼다.

“Et tu, Brute(브루투스 너마저도)?”

우리의 뇌리 속 브루투스는 배신자이지만 당대인들에겐 고결한 인물로 여겨졌다. “우리가 카이사르를 죽인 건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란 그의 연설에서 진심을 느꼈다. 공화정에 대한 헌신 말이다. 브루투스는 그러나 제정으로의 시대 흐름을 바꿀 순 없었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3·15는 카이사르의 비극이라기보다 오히려 브루투스의 비극이 아닐까”라며 “시대에 거부당한 고결한 정신의 비극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눈감은 고결한 정신의 비극”이라고 썼다.

격동의 3월을 보내고 있다. 헌정사 초유의 대통령 파문 앞에 다들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특히나 지난 대선에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택한 이들은 더한 책임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 일부는 현실을 외면하기까지 한다. 주로 중도우에서 우의 유권자들이다. 이들의 부유(浮遊)는 여론조사에서도 완연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시대 변화를 외면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이란 점이다. 오히려 퇴행했다. ‘국민이 헌법을 만들어 낸 힘의 원천’이란 것도, 자신이 움켜쥔 권력이 잠시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거라는 것도 몰랐다. 배신한 건 우리가 아닌 그다.

그가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지금, 시선을 미래로 돌려야 한다. 대선까지 남은 50여 일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인물을 골라야 하지 않겠나. 차선 혹은 차차선이라도 말이다.

고정애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