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公使)가 지난 10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월간중앙과 만났다. 이날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이 인용(認容)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지난 2월 김정남 피살사건으로 태 전 공사의 신변에 위협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정보당국은 경호인력을 늘리는 한편 외부활동 자제를 권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활동을 중지할 수 없다”며 월간중앙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태 전 공사는 “김정남이 기본 줄기라면 김정은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김정은 혼자 백두혈통으로 인정받으려면 ‘곁가지론’과 함께 김정남을 땅속으로 묻는 길밖에 없다. 이것이 김정남 암살의 이유”라며 “김정은으로서는 김정남의 시신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태 전 공사와의 주요문답.(태 전 공사와의 인터뷰 전문은 월간중앙 4월호에 실린다)
과거 적대·동요계층 위주 이탈 #이젠 핵심계층도…탈북 3만 명 #장마당 건드리면 주민 큰 반발 #봉기로 체제 무너질 가능성도
-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무엇을 느꼈나
- “전 과정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원칙에 따라 내려진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통합과 화합, 그리고 새로운 민주화의 시대가 열리기를 희망한다.”
- 최근 촛불집회, 친박(태극기)집회를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을 것 같다.
-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북한에서도 일어나서 한반도가 하나로 통일되고 민주화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소원이다.”
- 북한체제 붕괴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는 뭔가
- “김정은이 2012년 ‘모란봉 악단’을 만들어서 첫 공연을 했을 때를 봤을 것이다. 모란봉 악단은 미국 노래 ‘마이웨이(My Way)’를 불렀고, 짧은 치마를 입었다. 한국으로 치면 걸그룹이었다. 주민들은 ‘이제부터 좀 잘사는 길이 열리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북한을 이끌어보니 잘못하면 세습체제가 자신의 대에서 붕괴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김정은이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정책을 계승하는 방향으로 틀 수밖에 없었다.”
- 탈북자의 유형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 “북한의 성분제도는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 세 가지로 나뉜다. 지금까지 한국에 온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동요계층과 적대계층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김정은 정권하에서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핵심계층에서 많이 탈북하고 있다. 그만큼 동요가 심하다는 증거다.”
- 북한에 장마당 등 시장경제 요소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들었다.
- “북한은 법률적으로(공식적으로)는 장마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정은이 장마당을 왜 없애지 못하는가? 장마당을 치는 날에는 대중 봉기가 일어난다는 것을 김정은은 잘 알고 있다. 비록 장마당이 장기적으로는 (체제에) 위협요소가 되지만 일정한 자유를 허용해주면서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반발과 불만을 해소해보자는 생각이다.”
- 김정남 피살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봤나
- “당초 김일성 후처의 아들인 김평일(체코 북한대사)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사정을 잘 알았던 김정일은 ‘이거 쉽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김평일 측근들의 비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때 김정일이 내놓은 이론이 ‘곁가지론’이다. 기본 줄기가 튼튼하게 잘 자라려면 곁가지를 쳐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곁가지론을 말하지 않는다. 김정남이 기본 줄기이고, 김정은이 곁가지다. 그래서 김정은은 백두혈통론을 편다. 누구든 김정일의 피만 물려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 김정남의 시신 인도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 “김정남 시신을 북한에서 가져가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는 김정은 체제의 걸림돌이 된다. 김정남이라는 존재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려면 그 시신마저도 북한으로 가져가서 없애버려야 한다.”
- 말레이시아에서 김정남의 시신을 북한에 넘겨줄까
- “김정남 시신에 대한 ‘결정권’은 중국이 쥐고 있다. 김정남 시신 문제가 불거지자 북한은 리길성 외무성 부상(차관급)을 중국에 보냈다. 중국에 왜 갔을까? ‘절대 시신을 중국이 받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김정은으로서는 김정남의 시신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말레이시아와 단교(斷交)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다.”
- 미국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나
- “김정은은 목숨이 좌지우지될 만큼 위기가 조성되면, 다시 말해‘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공격이나 해보고 죽자’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 대북제재에 대한 중국의 이행의지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 “중국이 김정은 체제를 허물어버리고 핵을 포기시키겠고 결심만 하면 2, 3년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은 그보다는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북한을 길들이기를 원할 것이다.”
최경호·박지현 기자 squeez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