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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우리도 짐 싸야 하나” 창조경제혁신센터 존폐 갈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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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존폐 위기에 처했다. 12일 서울 광화문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는 한적한 모습이었다. [사진 하선영 기자]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존폐 위기에 처했다. 12일 서울 광화문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는 한적한 모습이었다. [사진하선영 기자]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부속 인큐베이팅센터가 자리한 서울 광화문우체국 건물 5층. 지난 12일 이곳엔 관리인 1명만 한적한 로비를 지키고 있었다. 50여 곳의 스타트업이 입주했던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평일, 주말 관계없이 출근자와 방문객이 북적였지만 이날은 종일 오가는 이가 드물었다.

박근혜 경제정책 사실상 폐기 수순 #“정권 바뀌면 여기도 문 닫게 될 것” #입주 기업인들 퇴출 위기감 확산 #정책 시행 2년 지났지만 성과 미흡 #지원 끊긴 서울센터, 25개사 떠나 #“벤처 육성·일자리 창출 지속 필요 #민간 주도로 운영되게 길 터줘야”

이곳에 회사를 차린 스타트업 대표 강모(25)씨는 “정권이 바뀌면 여기도 문 닫게 될 거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입주한 이웃 기업인끼리 만나면 언제 방을 빼야 하는지가 주된 화제”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센터 측은 이곳에 입주하려면 경쟁률이 10대 1이라고 홍보하지만 올 초 입주 기업 신청 때 이미 경쟁률이 절반으로 떨어졌다”며 “서울시가 지원을 끊겠다고 발표한데다 얼마 전에는 25개 사가 왕창 나가면서 분위기가 흉흉하다”고 말했다.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가 자리 잡고 있는 서울 광화문 KT빌딩 1층도 상황은 비슷했다. 12일 오후 센터 내 5개 회의실 중 4곳에 불이 켜져 있었으나 창업과는 무관한 취업 준비생들의 스터디 모임이 대부분이었다.

지난달 경기도 판교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일하는 스타트업 직원들. [중앙포토]

지난달 경기도 판교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일하는 스타트업 직원들. [중앙포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핵심 정책 기조였던 ‘창조경제’도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부회장은 최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비선 실세’ 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공판에 증인으로 나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창조경제혁신센터에 기업들이 동참한 것은 사실상 압박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재계에서는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센터 건립의 부당성이 부각된 데다 60일 후에 새 정부가 들어서고 나면 ‘창조경제혁신센터’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관계자는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권이 구호처럼 내세운 창조경제는 앞선 정부들의 혁신경제, 녹색성장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을 갖고 태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창업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창업자들이 한곳에 모이고 금융사, 컨설팅사, 인재 공급을 지원하는 조력부대 등이 한데 얽혀 규모의 경제를 형성해야 하는데 작은 땅덩어리에 18개나 되는 센터를 흩어서 지어 놓고 창업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한 것은 애시당초 무리였다”고 지적했다.

일부 지역에선 이미 ‘창조경제혁신센터’라는 명칭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다음달 대구에 문을 여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육성 단지인 삼성창조경제단지의 이름을 ‘삼성크리에이티브캠퍼스’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삼성 측은 “글로벌 시대에 걸맞고 창의·혁신·도전 등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명칭 변경을 검토하는 것일 뿐 정권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시기가 공교롭다는 의심은 피하지 못하고 있다. 센터 운영이 흔들리는 곳도 나오고 있다. 전남센터 등은 제2센터 개소식이 연기되다 지난달에야 문을 열었고, 일부 센터의 경우 차기 센터장 공모에 응모자가 나오지 않아 애를 먹은 곳도 있다.

정부는 창조경제혁신센터 홈페이지에 별도 창을 만들어 18곳 센터의 성과를 홍보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센터를 통해 창업한 기업 수가 지난 1월 현재 1713곳, 신규채용이 2524명, 매출증가 효과 2866억원에 달한다고 적혀 있다. 멘토링 서비스도 2만3000건에 달해 창업자의 고민 해결에도 한몫했다고 설명한다. 익명을 요구한 경영학과 교수는 “청년 창업 강조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일자리 대책은 기업들의 투자 심리 회복”이라며 “청년과 일자리를 강조한 박근혜 정부에서 ‘고용절벽’ ‘취업절벽’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은 창조경제를 통한 창업 생태계 조성이 단시간내 이뤄지지 않는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창조경제의 ‘과’는 버리되 ‘공’은 계승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창조경제라는 화두를 던져 벤처 육성과 일자리 창출을 국정의 주요 과제로 삼은 것은 정권과 관계없이 지속돼야 한다는 측면에서다. 청년창업재단 디캠프의 김광현 센터장은 “청년 창업이 1~2년 사이에 경제 활력을 높이고 일자리 창출에까지 기여하기는 어렵다”며 “정부는 창업 토양이 전혀 없는 곳에 뿌리는 마중물 역할에 그치고 센터는 점차 민간 주도로 운영되도록 길을 터줘야 장기적으로 성과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부 관계자도 “정권에 따라 정통부부터 미래부까지 부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벤처 활성화를 통한 창업 생태계 조성은 결국 정부 조직 어느 곳에서든 끌고 나가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난 2014년 박 전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이후 추진이 급물살을 탔다. 박 전 대통령이 “뿌리 산업이 되는 중소·벤처기업 등을 육성하기 위해 지역에 기반을 둔 대기업이 사다리 역할을 해 자금 및 기술을 지원하는 등 창업 보육의 산실을 조성할 것”을 주문했다. 이후 그해 9월 대구를 시작으로 서울(CJ)과 경기(KT), 인천(한진), 경북(삼성), 광주(현대차) 등 전국 17개 시·도에 18개 센터가 순차적으로 문을 열었다.

박태희·하선영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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