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외톨이 ‘소녀’ 눈물로 시를 희롱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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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실업계 고교에 진학한 소녀는 졸업 후 큰 회사의 사무원이 됐다.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소녀가 아니었다. 옥탑방에서 혼자, 아니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가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도 싶었지만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이마를 더듬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어른이 됐어도 소녀는 여전히 상상을 하며 혼자 놀았다. 막장 속 아버지가 한때는 산업전사라 불렸고 또 한때는 폭도라 불렸다는 걸 그맘때 알았다.

말장난과 같은 상상을 글로 옮긴 것도 그맘때부터다. '육교'를 '육교(肉交)'라고 희롱하고, '식사'를 '식사(食死)'라고 부르고, '나 오독한다'를 '오! 독한 나'로 바꾸고, '하하하 시(詩)시(詩)시(詩)'를 줄여 '하시시'같은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상상 속에선 뭐든지 가능했다. 버거운 삶,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늘만 먹었다지/여자가 되겠다고?//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먹어본 적이 있기는 하니?'('곰곰')라고 풀어냈을 때, 상상은 비로소 시가 됐다. 이렇게 낳은 시를 모아 2001년 시인이 됐다.

"품에 안고 동냥젖을 물려준 언어에게 오체투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낮엔 일하고 밤에 시를 썼다. 어느새 서른 넷이 된, 외톨이 산골 소녀 안현미의 첫 시집 '곰곰'(랜덤하우스중앙)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시는 유쾌하고 발랄하다. 진지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 역력하다. 그렇다고 가벼운 건 또 아니다. 거침없는 상상력과 기상천외한 언어실험 이면엔 남몰래 흘린 눈물, 방울방울 쟁여있다. 이 신예를 주목한 건 이 때문이다. 사족 하나. 시인의 사생활을, 시인 말마따나 "감당하기 버거웠던 지난날"을 굳이 공개한 건 오로지 시집 때문이다. 앞서 적은 시인의 어제는 모두 시집에서 인용한 것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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