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연결고리 이정철 추방 … ‘김정남 암살’ 영구미제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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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정남 암살사건을 수사 중인 말레이시아 당국이 북한 국적 용의자 이정철을 기소하지 않고 3일 추방하기로 했다. 증거 불충분이 표면상 이유다. 이로 인해 사건 수사가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커졌다.

말레이시아 검찰 “물증·자백 없어” #외국 국적 여성 둘만 처벌 가능성 #일부선 “북한의 전방위 외교전 성과” #평양서 급파된 이동일 “남한이 배후”

김정남 피살 사건의 유일한 북한 국적 구금자 이정철(사진)이 3일 북한으로 추방된다. 말레이시아 모하멧 아판디 알리 검찰총장은 2일 “이정철을 기소하기엔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합법적 체류서류를 갖추지 못한 이정철을 말레이시아에서 추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철의 구금 기간은 3일 만료된다. 이정철은 결국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귀환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철의 추방으로 수사는 교착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정철은 말레이시아 당국이 북한 용의자 중에서 유일하게 신병을 확보한 인물이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피살된 사건을 수사하는 데 유력한 연결고리였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이정철을 지난달 17일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의 도주를 도왔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이후 13일간에 걸쳐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했으나 결국 이정철의 입을 열지 못했다. 피살 현장인 쿠알라룸푸르 공항의 폐쇄회로TV(CCTV)엔 용의자 4명이 이정철의 차량에 탑승하는 장면이 찍혔지만 이정철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가 없어졌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력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지 경찰은 본지에 “말레이시아 형법에서 중요한 건 살인의 의도성을 확증하는 것”이라며 “이정철의 경우 그런 물증이나 자백이 없었다”고 말했다. 외교가에선 북한의 전방위 외교전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지난달 28일 쿠알라룸푸르에 급파된 이동일 외무성 국제기구국장은 말레이시아 당국과 비공개 접촉을 통해 이정철 석방과 김정남 시신 인도 등을 요청해왔다. 그의 물밑 작업이 말레이시아의 석방 결정에 영향을 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동일 북한 외무성 국제기구국장이 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북한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는 김정남이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주장했다. [뉴시스]

이동일 북한 외무성 국제기구국장이 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북한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는 김정남이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주장했다. [뉴시스]

이동일은 이정철 석방이 공식화된 2일 오후 기자회견을 자청해 한국이 이 사건에 연루됐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는 “북한 시민(citizen)이 사망한 뒤 남한은 우리를 지목했으며 독살이라고 신속하게 밝혔다”며 “어떻게 이런 일을 미리 알 수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암살 실행범인 도안티흐엉 등) 여성들이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다는 사실도 있다”며 “정치적 혼란에 빠진 한국은 지금 (혼란을 덮을) 큰 사건이 필요하다”며 한국을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 그는 또 “윤병세 장관이 제네바 (유엔 회의에서) 우리가 화학무기를 갖고 있다는 크나큰 거짓말(great lies)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동일은 김정남의 사망 원인인 독극물 VX에 대해서도 “만약 사실이라면 독극물을 맨 손바닥에 묻힌 여성들은 어떻게 무탈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2일을 기점으로 북한은 일단 유리한 위치에 섰다. 이정철이 석방되고 다른 용의자들은 이미 도주했거나 신병 확보도 하지 못했다. 현지 외교 소식통은 “자칫 베트남·인도네시아 국적 여성들만 처벌될 수 있다”며 “이는 북한에 최고의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이날 북한과 2009년 맺었던 비자면제협정을 파기했다. 말레이시아에서 1000여 명의 북한 근로자가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강도가 약하지 않은 조치라는 평가다. 그러나 사건 직후 말레이시아가 북한과의 단교까지 고려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말레이시아가 북한과 타협점을 찾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쿠알라룸푸르=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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