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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부시 갈등 … 한·미 관계 표류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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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번에는 어떤 수사(修辭)로 북한을 미치게 만들까. 북한은 이란.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이다(2002년),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는 무법정권이다(2003년),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이다(2004년), 북한은 핵을 포기하라(2005년)고 4년 연속 북한을 공격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아닌가.

그러나 부시의 이번 국정연설을 주목한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정권교체 같은 방법으로 북핵을 해결하려고 한다면 한국과의 마찰을 각오하라고 경고했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을 향해 한 발언으로는 참으로 솔직.과감.투박하고 비외교적이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의 시몬 티스돌은 "과거에는 이런 반항적인(Mutinous) 발언은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논평했다. 미국의 AP통신은 "한국 대통령이 미국에 북한의 전체주의 정권을 압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확대해석했다. 미국 사람에게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곧장 북한 전체주의 정권 옹호로 들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목을 끌어당긴 부시의 국정연설에는 다행히 북한에 대한 독소조항이 빠졌다. 부시는 이렇게 말하는 데 그쳤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민주국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시리아.미얀마.짐바브웨.북한.이란 같은 나라에 사는 나머지 절반의 사람을 잊지 않을 것이다." 북한문제에 관한 한 어조가 한결 부드럽다. 한국 정부는 노 대통령의 대미경고 약효로 해석할지도 모른다. 그건 아전인수(我田引水)다.

부시는 1월 말 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에 간접적으로 이미 대꾸했다. 그는 말했다. "누가 가짜 우리 돈을 만들면 우리는 그걸 막으려고 한다. 우리는 북한에 가짜 달러를 만들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다른 나라들과도 협력한다. 그건 경제제재가 아니다." 부시의 그 말이 나오기 전에도 미국 정부는 위폐문제는 협상 대상이 아니고 6자회담과도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부시는 국정연설에서 폭정 종식에 대한 굳고 변함없는 미국의 의지를 재확인했다.

문제는 꼭 공개적으로 북한에 국제적인 망신을 주는 것이 위폐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인가다. 북한으로 하여금 6자회담에 나올 명분을 주면서 위폐문제 해결책을 찾아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은 한국이다. 그런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노 대통령은 미국이 너무 북한을 닦달하면 한국이 가만있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해버렸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정부야 뭐라든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한.미 관계는 동맹국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북한에 관한 한.미 대통령들의 갈등은 그들의 상반된 이념적 성향과 지향하는 목표를 생각하면 전혀 우연이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절대적인 리더십에 자신을 가졌다. 미국 주도로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확산하는 것이 그의 외교철학이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자유를 얻는 수단이다. 민주주의를 통한 자유의 실현, 그것이 부시가 지금 이라크와 중동에서 실험 중인 정책이다. 다음 차례가 북한.미얀마.짐바브웨.이란 같은 전체주의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어떤가. 그의 지난해 9월 유엔 연설이 답이다. 그는 5분짜리 연설에서 제국주의적 사고의 잔재를 청산하고 강대국 중심주의를 경계하자고 역설했다. 국제판 386세대적 발상이다. 오늘의 국제정치에서 제국주의와 강대국 중심주의로 연상되는 나라는 미국이다. 노 대통령은 미국에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한 꼴이다. 한국과 미국은 이상한 동맹국가가 되어간다. 노 대통령의 민족자주 노선과 부시의 미국 제일주의의 충돌이 원인이다. 미국에선 대북 온건파의 견해가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배제되고, 한국에선 대통령이 미국 도발을 즐기는 기형적 분위기에서 어찌 한.미동맹이 흔들리지 않고, 6자회담이 안개 속에 빠져들지 않겠는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