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르포] 북한 급파 이동일, 95분 외출 미스테리...세련된 재킷에 유창한 영어 이동일은 누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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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은 28일 종일 분주했다. 굳게 닫혀 있던 갈색 현관문이 정오쯤 활짝 열리면서 강철 대사가 굳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약 20m 떨어진 파란 철제 대문에 취재진이 늘어서서 질문 공세를 폈지만 묵묵부답으로 탑승했다. 그를 태운 차량은 취재진을 따돌리기 위해 급발진에 가까운 속도로 대사관을 떠났다.
강 대사가 서둘러 향한 곳은 쿠알라룸푸르 공항이다. 김정남이 피살된 바로 그곳이다. 강 대사는 평양에서 온 특별한 손님을 맞이했다. 이동일 전 유엔주재 차석대사다. 현재 직급은 외무성 국제기구국장이라고외교 소식통은 귀띔했다.
이동일은 곧 북한대사관으로 들어왔지만 문을 굳게 닫지 않았다. 대신 기자들 앞에 섰다. 오후 2시40분 경이다. 그는 세련된 제스처를 써가며 영어로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들의 질문은 일절 받지 않았지만 자신의 의견을 또렷이 약 4분간 전달했다. 로이터 기자는 “매우 인상적이고 유창한 영어”라고 말했다. 이 국장은 짙은 남색 재킷에 베이지색 바지를 받쳐 입었다. 현지 외교 소식통은 “북한 외교관 중에서도 외양이며 영어 수준이 수준급”이라고 귀띔했다.
오후 4시40분 경, 북한대사관의 철문은 다시 열렸다. 곧 ‘1번’ 번호판을 단 강 대사의 차량과 ‘2번’을 단 차량이 이동일 국장 일행을 태우고 사라졌다. 이들은 6시15분경 돌아왔다. 취재진의 질문에 이 국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이 국장의 표정은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과히 어둡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이동일 국장을 북한 당국이 급파한 것은 의미가 크다. 우선 그가 한 발언 내용을 보자. 그는 기자들에게 “인권 문제를 논의하고 합의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체류 기간 동안 말레이시아 측과 세 가지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며 “첫째는 지난 13일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사망한 북한 인민의 시신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것이고, 두번째는 말레이시아 경찰에 체포된 북한 시민(용의자 이정철)의 석방 문제, 마지막으로는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이 국장은 기자들 앞에서 “말레이시아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왔다”고도 강조했다.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대사가 지난 22일 “말레이시아 정부가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는 등 거친 표현을 동원하며 ‘생떼 기자회견’이라는 비난을 자초한 것과 대조된다. 북한이 김정남 피살을 둘러싼 외교전을 본격 개막한 셈이다.
이동일의 방문 타이밍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의 방문은 이정철 등 용의자들의 기소가 가시화하는 시점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말레이시아 법무장관은 이날 기자들을 만나 “용의자들을 내일(3월1일) 기소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직접 범행에 가담한 베트남 국적 도안 티 흐엉과 인도네시아 국적 시티 아이샤의 구금 기한은 3월1일까지다. 또 한 명의 용의자인 북한 국적 이정철은 3월3일 구금 기한이 만료된다. 조사를 계속하기 위해서도 말레이시아 당국은 이들을 기소할 필요가 있다.
이 국장은 한국 기자들과는 악연도 있다. 한국 기자들에게 공개 석상에서 면박을 줬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아세안지역포럼(ARF)에서 외무성 대변인 자격으로 참석해 내외신 대상 기자회견을 연 자리에서였다. 한 기자가 한국어로 질문을 하려 하자 그는 ”영어로 질문하라”고 핀잔을 줬다. 이 ARF가 열린 곳도 쿠알라룸푸르였다.
쿠알라룸푸르=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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