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법원 보수선회에 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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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것 이외에는 무엇이든 할수있는게 영국의회라는 말이 있지만 미국에서는 국가정책결정에 있어서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역할을 하는것이 법원이다. 특히 대법원은 제반 연방법률에 대한 위헌여부심사권을 행사, 의회가 의결한 법률과 행정부가 공포한 시행령을 무효화시킬수 있고 실제로 건국이래 1백건이 넘는 중요법률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린 바 있다. 예를둘어 대법원은 54년 각급학교의 흑백분리수업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시설내용이 동등한 한 공중시설의 분리는 합헌적이라는 그때까지의 시책이 번복된 것이다. 법원의 새로운 판결은 그 시각부터 미국의 법률과 정책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중대한 권능을 가진 미대법원판사는 종신직이다. 따라서 대통령이 대법원판사를 임명한다는것은 임기후까지도 자신의 족적을 사법제도상에 남기는것이 된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이 지난 7월1일 「로버트·보크」 워싱턴 DC고등법원판사를 대법원판사로 임명한 것은 당장 더욱 각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수야당 민주당의 임명비준반대를 격파, 승리할 경우 행정부와 의회를 통해 이루지못한 자신의 정책목표를 사법적문제에서나마 실현하겠다는게 「레이건」대통령의 생각이었다.
지난 6월 9명의 대법원판사중 중도적 입장에 서왔던「루이스·파월」판사가 은퇴하자「레이건」대통령은 대법원을 자신의 성향과 일치하는 보수쪽으로 재편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초보수로 알려진 「보크」 판사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이래 작년7월 「윌리엄·렌퀴스트」대법원판사를 대법원장으로 승진 임명하는 한편 그 후임에 「앤토닌·스캘리아」를 보임하고 그전 81년에 「샌드러·오코너」여판사를 새로 임명했다.
결과적으로 「보크」 임명전까지만 해도 미대법원은 보수파 4,진보파 4, 중도1의 평형을 유지해온 셈이다. 만약 「보크」 판사가 들어서면 이 평형이 깨지고 대법원이 돌이킬 수 없는 보수우세가 될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그러나 상원 법사위는 지난 6일 「보크」 판사에 대한 인준을 9대5로 부결시켰다.
대법원판결기록에 나타난것을 보면 보수대 진보파의 표대결성향이 점점 가열되고있다. 예를 들어 83년에서 85년까지 2년동안에는 9대0, 8대1 또는7대2등 대체적으로 합의에 가까운 표결이 1백7건인데 비해 6대3, 5대4같은 팽팽한 대결은 56건에 그쳤다. 그러나 지난 6월말까지의 2년동안은 각축표결이 절반을 넘는 81건이고 수월한 표결은 78건에 머물렀다.
이같은 추세를 감안하고 특히 「보크」판사의 성향을 고려할때 진보파로서는 그의 임명을 좌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전통적으로 진보세력을 대변하는 민주당으로서는 작년 중간선거로 다수당이 된것을 계기로 이를 저지할 실력을 갖추고 있을뿐 아니라 내년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수 없는 형편이어서 더욱 거세게 「보크」판사임명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민주당뿐 아니라 혹인·여성단체·노조같은 각종 사회단체등 「보크」 저지세력은 『그가 대법원의 평형상태를 깨뜨림으로써 지난 30년간 법적투쟁을 통해 성취한 민권과 이미 법으로 확립된 지위가 하룻밤사이에 번복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변호사,「닉슨」행정부의 법무차관, 예일大교수등을 거친 「보크」 판사는 임신중절을 범죄로 규정한 주정부법률을 번복, 낙태행위를 합법화한 73년의 대법원결정을 비난했다.
임신중절을 헌법에 규정한 프라이버시권으로 해석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형찬성론자이다. 범죄퇴치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지지자들은 옹호한다.
언론자유도 파괴적이거나 음란한것은 규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지않아도 이란-콘트라사건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은 「레이건」대통령은 이번「보크」판사의 임명파동으로 잔여임기동안 심각한 통치력 감쇠를 감수해야할 처지에 놓였다.【워싱턴=한남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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