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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문명의 상전벽해의 한복판에 서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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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

문명의 성쇠는 직선적 발전과 독점이 아닌 곡선적 길항과 순환을 본질로 한다. 본시 초기의 인간공동체는 모두가 독립적이며 모두가 중심인 전중심(全中心) 구조였다. 즉 통중심(統中心)이었다. 이후 한동안은 여러 문명들이 두드러진 다중심(多中心) 구조였다. 고전적 세계화가 진행되며 각축하던 다중심은 몇몇 소수문명으로 통합되어 갔다. 문명 내의 독립성·자율성·다양성도 위계·주변·야만으로 편재되었다. 놀랍게도 동서 모두에서 문명과 야만은 ‘깨어난, 말이 통하는 인간들’ ‘깨어나지 못한, 말이 통하지 않는 들판짐승(같은 자)들’이라는 같은 뜻이었다.

한국은 세계질서 재편기마다
침략·분할·식민 등 피해 입어
다양한 인재와 의견 담아낼
국가제도와 헌정체제 고안해
세계를 전(全)중심으로 만들
새 경계국가·가교국가 되어야

중세적·근대적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서양과 동양, 유럽과 아시아의 지구적 문명표준 경쟁이 본격화했다. 두 중심이냐 한 중심이냐 경쟁이었다. 이때 유럽에서 ‘근대’와 ‘문명’의 철학적·현실적 결합은 다른 ‘문명들’을 야만·미개로 (재)정의하며 숱한 ‘전통들’을 주조했다. 근대가 아닌 문명들은 미개가 되었다. 근대와 전통, 문명과 야만의, 그리하여 근대와 문명, 전통과 야만이 만나는 초유의 이항적·직선적 분립이었다.

이제 숱한 ‘전통들’ - 실제는 ‘문명들’ - 은 곧 “문명을 심어줘야 하는” 식민(지)가 되었다. 애초 별빛·박사·향유의 원천이었던 ‘동방’·동양 ‘문명’은 서양에 정복의 대상으로 변전되었다. 유럽인들에게 ‘동’ ‘동방’은 실제로는 유럽 밖의 모든 세계를 의미했다. 본래 ‘해가 뜨는 곳’ ‘새벽’ ‘밝다’는 뜻의 동·오리엔트·아시아는 미개·전통·시원으로 전변되고, ‘해가 지는 곳’ ‘저녁’ ‘황혼’을 뜻하던 서·옥시덴트·유럽은 발전·문명·성숙으로 전면 전복이 일어났다.

그러나 근대화와 식민화의 병행은 끝내 문명·근대문명의 정점에서 내부대결, 즉 서서대결로서의 유럽내전과 세계대전-1차 대전과 2차 대전-으로 대폭발하고 말았다. 문명 내의 전쟁이야말로 전 지구적으로 가장 자멸적·파괴적이었다. 자유주의와 볼셰비즘과 나치즘,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대결은 본질적으로 서양 대 서양, 서구이념 대 서구이념의 충돌이었다. 장소와 문명으로서의 ‘동’ · ‘동양’은 완전히 실종되었다. 두 중심의 세계질서였던 동서이데올로기·동서냉전이라고 부를 때 ‘동’은 ‘서’에게는 장소·동양이 아니었다. ‘어둠’ ‘문명 밖’ ‘공산세계’였다.

냉전의 해체는 서서대결의 종식이었다. 나치즘처럼 볼셰비즘도 서구 내 대안의 붕괴였다. 냉전 이후 마침내 동·동양·아시아가 장소로서의 개념을 다시 획득하자 문명은 곡선과 순환으로 재진입했다. 세계는 미국의 짧은 단(일)중심을 거쳐 다시 다중심으로 전이하려 하고 있다.

이때 근대세계문명과 질서를 정초·주도하고, 세계문명표준을 자처하며, 항상 세계화를 선도하던 영국과 미국은 유럽 및 세계 “밖에서” 그들과 대면하려는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을 선택했다. 특히 후자는 국경·인종·문명·종교·이주의 장벽을 다시 쌓고 있다. 문명국가에서의 계속되는 극우의 진출 역시 마찬가지다. 장벽허물기의 자기역전, 즉 장벽쌓기로의 지구적 재귀요 상전벽해다.

세계의 문명과 제국 사이에 경계국가·가교국가로 위치해 질서재편기에는 항상 침략·분할·식민을 포함한 피해를 자기와 세계에 보여준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나. 특별히 문명재편기에 (중국·러시아 대) 미국·영국·일본이 연대하면 망국·분단·전쟁의 격변을 겪어 온 우리는 각각 세계·유럽·동아시아로부터 한발을 빼는 세 국가의 강한 재결합을 목도하며 다시 예리한 국제적 경각의 눈을 떠야 한다.

많은 경계국가가 문명의 교차지대로서 피해를 보기도 했지만, 가교역할을 통해 자기와 세계의 교류와 공존, 번영과 평화에 눈부시게 기여했다. 출발은 전적으로 내부의 타협과 통합, 연합과 연대였다. 문명대화·문명가교·문명통합에 앞선 내부대화·내부연합·내부통합을 말한다. 트럼프·아베·시진핑·푸틴의 강성국가주의에 대응하고, 김정은의 시대착오적 군사주의에도 맞설 현지현책(賢之賢策)을 찾자. 마음바닥까지 이리도 간절하고 절실한 적이 없었다.

출발은 어떤 인재와 의견도 버리지 않고 담아낼 국가제도와 헌정체제의 안출이다. 갈등을 타협·통합·동력으로 만들어 내는 제도, 그것이 시작이다. 온 나라, 온 국민이 5년에 한 번씩 둘로 쪼개지고, 다시 전면 부정을 반복하며 권력창출·진영논리·상호대결·대통령의제를 좇느라 국가미래·국가의제·장기기획·거시전략의 개념조차 완전히 상실해 온 구질서를 전면 혁파하자.

그리하여 끝내 우리 자신을 넘어 주변 강성주의들을 공존과 대화로 이끌어 마침내 아시아와 세계를 다시 전중심으로 만들자. 경계국가 대한민국, 여기에서 시작하자. 각자 똑똑한 우리들, 한번쯤은 세계가치와 지혜를 선도해 문명순환의 세계변곡점을 이끌어 보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