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의리 초콜릿' 스트레스…"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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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이었나? 별생각 없이 준비 안했다가 종일 구박받았어요. 우리 팀 여직원 중에 저만 빼고 다들 하다못해 천원짜리 초콜릿이라도 준비를 했더라고요. 장난스러운 구박이긴 했지만 은근히 신경쓰였죠. 작년엔 다행히 일요일이라 그냥 넘어갔지만, 올해는 회사 가는 길에 꼭 사서 가려고요.”

직장인 김모(30ㆍ여)씨는 몇년전 발렌타인데이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김씨가 있던 팀에는 여성직원이 4명에 남성직원이 3명 있었는데 김씨를 뺀 다른 여성직원들이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남성직원들을 위한 초콜릿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그는 “애교 많은 여자 후배가 ‘남자친구 걸 만드는 김에 팀장님 것도 만들어왔어요’하면서 초콜릿을 건네는데 팀장님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고요. 민망하기도 하고 여자 후배가 얄밉기까지 하더라고요. 은근히 스트레스 였죠”라고 덧붙였다.

발렌타인데이를 맞은 여성 직장인들의 고충이다. 발렌타인데이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연인이나 좋아하는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그런데 몇년전부터는 연인이 아닌 주변 동료나 친구들에게도 예의상 초콜릿을 주는 분위기가 생겼다. ‘의리 초콜릿’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다.

특히 사회생활 첫발을 내딛은 인턴사원이나 직급이 낮은 직장인들은 작은 부담을 넘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한 유통회사에 취업한 조모(26ㆍ여)씨는 “초콜릿까지 챙겨야 된다는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주변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다들 준비를 한다고 해서 사놓긴 했어요. 시작부터 찍히면 안되니까요. 그런데 어느정도 가격대를 사야할지, 또 회사 내 사람이 한두명도 아니고 어느 선까지 줘야할지 정하는게 너무 어렵더라고요”라고 부담감을 호소했다.

심지어 부담은 해가 갈수록 조금씩 심해지고 있다. 5년차 직장인 신모(29ㆍ여)씨는 “몇년전만 해도 준비를 하면 센스 있는거였지 안준다고 눈치 볼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느새 조금씩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귀찮고 부담돼서 남자친구 것도 준비 안한지 오래됐는데, 어쩔수 없이 직장 동료들 건 챙기게 됐어요”라고 전했다.

그러나 초콜릿을 받는 남성직원들도 억울할 수 있다. 남성직원들이 초콜릿을 달라고 요구하거나,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는 경우는 극히 일부일 뿐이란 의견도 많다. 또 일부에선 “화이트데이도 있고,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라도 보답을 해줘야 될 것 같아서 받는게 오히려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한 중소기업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는 최모(37)씨는 “나도 무슨 ‘데이’에 직장 후배에게 초콜릿이나 과자를 받아 봤는데,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둘 다 부담이 되는 것 같아 불편했어요. 아마도 기업에서 초콜릿 판매를 늘리려고 ‘의리 초콜릿’ 같은 상품을 만들고, 일부에 남아있는 ‘꼰대’ 문화까지 더해지면서 이런 분위기가 늘어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의리 초콜릿’ 외에 다른 부담도 있다.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비슷한 제품도 더 비싸게 팔거나, 평소보다 식당 등을 예약하기도 더 어렵기 때문이다. 얼마전 ‘썸’을 타기 시작했다는 직장인 4년차 직장인 김모(29)씨는 “적당한 식당들이 예약이 다 차서 15만원이 넘는 호텔 뷔페를 예약했어요. 부담이 되지만 그동안 받은게 있는데 발렌타인데이에는 제대로 챙겨줘야 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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